- 2020년 영화 <백두산> <속물들>에 출연한 후 <씨네21>과 처음 만났고, 오늘 재회하기까지 영화 6편, 드라마 4편, 연극 2편에 이름을 올렸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작품들까지 고려하면 정말 쉼 없이 일해왔다.

= 멈추지 않고 달려온 느낌이긴 하다. 촬영 일정이 겹칠 때마다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그래서 운동하고 여행 다니며 쉬어가는 지금 이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 잘하고 있는 건지 3년 내내 의심했는데, 되돌아보니 그간 너무 가혹했나 싶었다.

= 몰랐는데 그런 면이 있더라. 항상 최고치를 상정하고 그에 못 미치면 힘들어하는 스타일이다.

- 예능 프로그램 <언니들이 뛴다-마녀체력 농구부>에서 ‘악바리’란 별명을 얻은 게 생각난다. 목표치에 다다르고자 하는 승부욕과 해냈을 때의 성취감이 큰 걸까.

= 조금 다른데, 사실 승부욕은 없다. 그래서 잘 내려놓는다. (웃음) 농구는 단체 운동이라 팀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했다. 아, 러너스 하이를 느낀 적은 있다. 체력이 극에 다다랐을 때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며 쾌감을 느끼는 건데 내게도 그때가 오더라. 그런 것들이 두루 작용해 경기장에서 악바리처럼 뛰긴 했지만 승부욕은 없다. 스스로에게 엄격할 뿐이다. <사랑의 고고학>을 찍을 때까지도 자신에게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는데 생각보다 영화가 잘 나온 걸 보고, 앞으로는 동료들을 믿고 마음을 좀 편하게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 <사랑의 고고학> 출연을 금방 결정했다고 들었다. 작품에서 어떤 매력을 느꼈나.

= 시나리오를 봤을 때 이런 글이 있다는 자체가 고마웠다. 내밀한 부분을 진득하게 살펴 나온 글이었다. 덮어두고 싶은 이야기일 수 있는데 디테일이 살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영실의 독특한 지점들도 눈에 들어왔다.

= 처음 받은 느낌은 편견이 별로 없다는 거였다. 본인에게도 타인에게서도 특정 나이대에 뭘 이뤄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낀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올곧게 밀고 나가는데, 보면서 힘이 났다.

- 이완민 감독이 옥자연 배우를 두고 ‘외로운 고고학자 역할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여겼다더라. 실제로 영실과 교집합이 느껴지던가.

= 나도 새로운 사람과 만나 관계맺는 것을 좀 어려워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비슷했다. 처음 배우 일을 시작했을 때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좋은 대학 나와서 왜 연기를 하냐”는 거였다. 하고 싶어서 한 것뿐 별 대단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니 다. 영실도 비교적 늦게 고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좋아하는 일이니 뚝심 있게 임한다. 차이점은 내가 영실보다 훨씬 빠릿빠릿하고 행동력 있다는 것. 그래서 연기할 때 천천히 움직이고 말하는 영실만의 리듬에 집중했다.

- 영실은 느릴 뿐만 아니라 도통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인식(기윤)이 가스라이팅을 할 때도 크게 화를 내거나 반응을 보이질 않아 무슨 마음일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 인간 옥자연으로서는 화를 많이 억눌러야 했다. (웃음) 영실이 인식을 많이 사랑했기에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느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생기를 점점 잃어간다. 가장 분노가 끓어올랐던 건 식당 신에서 인식이 트라우마를 운운하며 영실에게 간섭할 때였다. 표정에 화가 묻어났는지 감독님이 인식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연기해도 된다고 하셨다. 그땐 인식의 모든 걸 수용하는 영실이 바보 같았는데 생각해보면 나의 20대도 마찬가지였다. 30대인 지금이야 남이 날 통제하려 들 때 제지할 줄 알지만 과거엔 그렇지 못했다. 그 시절을 상기하며 인식에게 잘해주고 싶어 하는 영실의 마음에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영실과 가까워지더라.

- 매사 차분하고 느리게 반응하는 영실이 인식과 만나 사랑에 빠지기까지 단 8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8년간 이어온 관계를 끊어낸 뒤로는, 인식과 달리 속도가 느린 사람과 만나길 희망한다.

= 촬영 때 ‘유약한 사람’과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말에 빠져 있었다. 예술가인 인식에게 “너의 유약함을 알아봤다”며 영실이 호감을 표하자 인식은 기뻐한다. 자신의 유약함을 알아봐준 영실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고, 반대로 영실은 인식을 지켜줘야겠다는 섣부른 기사도가 생긴다. 그렇게 재앙이 시작된 건데. (웃음) 인식이 너무 힘들게 하니 그 반대급부의 사람을 떠올리며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한 거다. 하지만 이전 경험에 실패했다고 해서 또 완전히 반대의 사람을 떠올리는 건 사실 위험한 선택이라는 데 감독님도 나도 동의했다.

- 그런 영실을 보면서 관계에 관한 생각이 변하진 않았나.

= 일단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려는 영실의 노력엔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영실을 보며 그로 인해 사람들과 관계가 끊어지고, 생기를 잃는 데에까지 나아가면 안된다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어느 선까지 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할까. 촬영하면서 내가 나이지 못하고 특정 사람과 상황에 휩쓸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관해 좀 더 생각해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