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어렸을 적, ‘영계만이 인생의 즐거움’이라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여자친구는 반드시 쭉쭉 빵빵한 미녀야 된다고 굳게 믿는 할 라슨은 여자들에게 채이면서도 자신의 생활신조를 꿋꿋이 지키며 사는 노총각이다. 그러던 어느날 할은 우연히 유명한 심리 상담가인 로빈스와 함께 고장난 승강기에 갇히게 되고, 로빈스는 할에게 인간의 내면만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최면 요법을 선사한다. 예전과 달리 주위의 많은 여자들이 절세 미녀로 보이며 그녀들의 사랑을 얻게 되는 할. 그러던 와중에 할 앞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로즈마리가 나타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왜 자꾸 그녀는 앉기만 하면 의자를 부수고 속옷은 낙하산만한 걸 입는 것일까?■ Review 패럴리 형제의 영화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초창기 ‘아둔함의 황제들, 저열함의 몽상가’들이라는 별명답게 패럴리 형제의 명성은 차 안에서 맥주병에 오줌을 싸거나 정액이 든 우유를 마시는 배설통로로써의 몸 자체에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에서부터 패럴리의 화장실 유머는 서서히 바뀌게 된다. <메리에겐…>에서 벤 스틸러는 잊으려해도 잊지 못하는 메리를 향해 강한 욕망을 느끼는 자신의 몸 때문에 고통스러워 한다. 그리고 <미 마이 셀프 앤 아이린>의 주인공 짐 캐리에 이르러서는 주인공의 몸은 완전히 균열되어 육체적 배설의 통로가 아니라 광포한 내면의 하이드씨가 튀어나오는 심리적 배설의 통로로 또다른 몸의 기능을 선보인다. 이제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 이르러서 패럴리 형제는 배설물과 토사물의 구덩이에서 벗어나 드디어 그들의 몸의 유머학의 중심에 ‘본다’는 문제를 가져다놓는다. 여전히 ‘몸’은 패럴리 형제의 화두이지만 그들의 웃음의 급소는 서서히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짐 캐리의 원맨쇼에 기대어 미국사회의 모든 금기를 한데 모아 이에 도전하려 했던 패럴리 형제의 광포한 유머와 배짱은 일단 <내게는 너무 가벼운 당신>에 이르면 <메리에겐…>처럼 좀더 안전하고 달콤한 쪽의 웃음으로 선회하는 건 사실. 주인공 할은 ‘영계만이 인생 최고의 낙’이라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미녀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는 평범한 남성이다. 할로(hollow) 즉 텅 빈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는 할의 이름처럼 그는 여성의 외면만을 쫓다보니 실제로는 여성과 어떤 유의미한 관계도 맺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할은 어느날 저명한 심리 상담가의 덕분으로 그녀의 생김새가 어떻든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마법에 걸리게 된다.
<빌리지 보이스>의 짐 호버먼이 ‘미운 오리 새끼의 역전판’이라 지칭했듯, 이 영화의 웃음은 줄곧 140kg의 거대한 몸매인 기네스 팰트로를 천하 제일의 날씬이 기네스 팰트로로 착각하는 할의 착시 현상에 맞추어져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을 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운다’라는 우리네 속담을 거의 만화경적 시각으로 구체화시켜, 만국 공통의 웃음을 선사한다. 예를 들면 로즈메리가 스위밍 풀에 들어갈 때 할의 눈에는 날씬한 기네스 팰트로의 황홀한 몸매만이 보이지만 결과는 반 이상의 수영장 물이 넘쳐 수영장 속에서 놀던 아이가 나무에 매달린다. 아마도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근자의 영화들 중 ‘시점 숏’의 개념을 가장 창의적으로 활용한 케이스로 인간의 감각과 지각의 차이를 이만큼 유머 넘치게 설명하는 예도 드문 것 같다.
물론 패럴리 형제는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망가진 배우와 과장된 유머’ 전략도 포기하진 않는다. 이미 대머리에 배불뚝이가 된 우디 해럴슨이나 더벅머리 짐 캐리, 정액을 무스로 바르고 환하게 웃는 백치미 줄줄 넘치는 카메론 디아즈를 보고 박장대소했던 우리가 아닌가. 그러나 이들 모두를 합쳐도 140kg의 기네스 팰트로의 망가지는 신기록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다(이 점은 <아메리칸 스윗하트>에서 과자를 훔쳐먹으며 한 몸매를 과시하던 줄리아 로버츠의 망가진 모습도 어린애 장난 정도로 보이게 한다). 어쩐지 패럴리 형제의 배우들의 몸에 대한 가학적 장난은 장난꾸러기 소년들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멀쩡한 개미의 다리를 하니씩 떼어내며 킬킬거리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관객에게 충분한 보상적 만족을 주면서도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여전히 잔인하다. 비만과 장애인에 대한 놀림과 그들이 보여주는 황금 심장 사이에서 여전히 아슬아슬한 곡예를 벌인다.
결국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핵심은 ‘내면의 아름다움’이고 할은 자신의 눈에 보인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함으로써 로즈마리의 마음을 얻는다. 그렇게 보자면 패럴리 형제 영화들은 줄기차게 내면의 이드를 해방시킴으로써 얻는 카타르시스를 추구해왔다. 벤 스틸러의 고환을 꽉 문 지퍼가 메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원흉이었듯 모든 것을 꼬이게 만드는 초자아란 그들의 세계에서는 벗어던져야 할 위장전술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화장실 유머가 빠진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가 원제 ‘shallow hal’처럼 충분히 얕지 않다고 불평할지도 모르지만, 이로써 영화는 패럴리 형제들이 화장실로 관객을 몰아넣지 않더라도 상큼한 아이디어 하나로 충분히 초자아를 벗어던질 방법이 있음을,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웃길 수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kss1966@unitel.co.kr
패럴리 형제의 영화 속 실존 인물들
영화와 현실을 겹쳐보는 재미
패럴리 형제의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에겐 낯설지만 미국에서는 꽤 유명한 실제 인물이 등장하여 웃음을 선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메리에게 특별한 것이 있다>에서 카메론 디아즈의 전 애인으로 그린베이 패커즈 소속의 쿼터백 스타 브렛 파브르가 메리의 애인으로 나온 적이 있다. 이 장면에서 벤 스틸러는 메리에게 ‘왜 전 애인인 브렛 파브르를 선택하지 않았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카메론은 ‘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를 좋아하거든’이라고 대답하여 미국 사람들을 웃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김혜수에게 안재욱이 ‘왜 나 대신 선동열을 택하지 않았어’라고 물어보자 ‘응. 난 롯데 자이언츠를 더 좋아하거든’이라고 대답한 셈이기 때문.
이번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카운셀러 역으로 나온 토니 로빈슨 역시 동기 부여의 성자(The Mahatma of moyivation)라 불리는 실존하는 심리 상담가이다. 그는 앤드리 애거시부터 그렉 노만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에게까지 카운셀링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영화에서 할의 머리를 붙잡고 ‘사탄아 물러가라’며 사이비 교주 흉내를 내어 사람들을 웃긴다.
또 한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월트 역으로 나와 팔과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장애인 모습을 보여준 르네 커비. 그는 실제로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을 쓰지 못한 척추장애인으로, 커비의 부모는 아들에게 일절 목발이나 휠체어에 의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커비는 현재 미국에서 IBM 회사의 중역으로 있으며, 엔드타이틀의 화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일급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스키와 운동을 즐긴다(그렇다면 르네 커비는 지저분한 공중화장실에 들어갈 때 어떻게 할까? 영화를 보면 아시게 될 것임!). 이외에도 패럴리 형제들은 종종 자신들이 거주하는 로드 아일랜드 주민들을 작은 역할로 캐스팅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