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시골에서 막 베이징에 올라온 구웨이(추이린)는 퀵 서비스 배달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일한 몫으로 600위안을 지불하면 회사에서 지급한 자전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그는 더욱더 열심히 일한다. 그런데 자전거 대금을 거의 치러갈 무렵 구웨이는 그만 자전거를 도둑맞고 만다. 허탈해진 그는 자기가 알아볼 수 있다는 표시를 해두었다는 자기 자전거를 찾아 거리를 헤맨다. 결국 그는 자기 자전거가 다른 소년 지안(리빈)이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로부터 구웨이와 지안, 두 소년 사이에 무지막지한 자전거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 Review 소년이 이제 거의 자기 손에 들어올 찰나에 있던 자전거를 그만 잃어버리고는 막막해하던 때였다. 그때, 베이징의 거리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의 무리를 한도 끝도 없이 그야말로 마구 ‘토해내는’ 곳으로 보여진다. 확실히 베이징은 자전거의 도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그걸 눈으로 확인한 순간 소년이 가졌을 상실감, 박탈감은 더욱 크게 자기 마음속을 울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 그렇게 흔한 자전거가 왜 자기에겐 없는 것일까, 라고 한탄하고 있을 바로 그때 말이다. <북경자전거>는 그런 회심(灰心)에 빠진 소년들, 자전거라는 한 사물에 대한 그들의 집착과 욕망, 그럼으로써 겪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고투를 그린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한 소년부터 먼저 소개받는다. 구웨이, 더벅머리에 세련되지 못한 옷차림을 한 그는 우리의 짐작이 틀리지 않게도 시골뜨기 소년이다. 돈을 벌겠다고 베이징에 올라온 그는 퀵 서비스 배달원으로 일하게 된다. 도시의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것으로 돈을 버는 그에게 자전거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물건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 같은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하필이면 열심히 일을 해서 회사에서 지급한 자전거가 거의 자기 소유가 확실해질 때쯤 되어서 자전거를 도둑맞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만다. 낙심한 구웨이는 중요한 서류를 전달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그걸 그만 잊어버리고 자기 것이란 표시를 해두었다는 자전거를 찾겠다며 돌아다닌다. 그 바람에 그는 회사에서도 쫓겨나는 딱한 처지에 처하게 된다.이쯤 되면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비토리오 데 시카의 대표작인 <자전거 도둑>(1948)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자전거를 잃음과 동시에 일자리마저 잃은 구웨이는 분명 그 비슷한 일을 당했던 <자전거 도둑>의 안토니오와 꼭 닮은꼴이다. 그러나 <북경자전거>는 여기서 구웨이와는 환경면에서 다른, 따라서 자전거에 집착하는 동기면에서 상이한 또다른 소년을 소개함으로써 이것이 딱 절반만 데 시카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구웨이의 안타까운 일화가 어느 정도 일단락된 뒤에 다소 뒤늦게 등장하는 지안 역시 자전거를 간절히 원하는 소년이다. 하지만 구웨이와 달리 그에게 자전거란 친구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소통을 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고 또한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멋진 자전거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지안은 가슴 가득 자신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뿌듯한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한다.
분명 벼룩시장에서 산 자기 자전거이건만(지안의 말에 따르면) 웬 어수룩하게 생긴 녀석이 나타나 그게 자기 것이라고 강변하지 않는가. 그렇게 ‘소유권 분쟁’이 생긴 뒤로 상징적이게도 지안은, 구웨이가 일자리를 잃은 것처럼, 여자친구와 점점 멀어지게 된다.한대의 동일한 자전거를 놓고 구웨이와 지안, 두 소년을 대립하게 만들면서 영화의 드라마는 급경사를 타기 시작한다. 여기서 한번 더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떠올려보자. 안토니오가 어느 골목에선가 자기 것처럼 보이는 자전거를 발견했을 때 그는 도둑과 그 이웃사람들에게 무력하게 쫓겨나야만 했다. 그러나 지안이 타고 있는 자전거가 자기 것임을 확신한 구웨이는 안토니오처럼 어물쩡 물러나지 않는다. 자전거를 두고 구웨이와 지안은 싸움에 싸움을 되풀이한다.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사회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런 무지막지한 싸움뿐이었던 것일까? 결국 둘은 자전거를 ‘공유’하기로 협정을 맺지만 그것이 둘 사이에 화해를 마련해준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후반부의 한 장면에서 지안이 구웨이에게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을 때 영화는 둘이 손을 잡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 컷을 해버린다). 불완전한 소유, 혹은 어색한 공유에 타협한 두 소년이 진정으로 공유하는 것이라곤 곧 다가올 잔혹한 고통일 뿐이다.영화는 동정없는 세상에서 상처받는 이 청춘들을 겉으로는 꽤나 무감한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멀찍이 떨어진 시선하며 조금씩 늦은 반응들은 인물들에 대한 섣부른 동화(同化)를 저어하는 듯도 하지만 서서히 그러면서도 이해심을 가지면서 그들의 감정에 다가간다. 예컨대 구웨이야 그 곤란함이 먼저 소개되었으니 그를 보면 혀를 끌끌 찰 수도 있지만 나중에 등장하는 지안 같은 경우는 혹 구웨이의 자전거를 훔쳐간 도둑은 아닐까, 해서 선뜻 그 처지를 이해해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구웨이에게 자전거를 빼앗긴 뒤 허탈해하고 있는 지안을 카메라가 오래 비추고 있을 때쯤이면 우리는 그에게 공감하게 된다. “그래, 그 자전거는 진정 네 것이기도 했구나.” 그렇게 영화는 생존의 욕구든 또는 과시의 욕구든 그것을 박탈당한 두 소년을 차별없이 똑같이 이해하고자 하는 너른 품을 가졌다.
기본적으로 <북경자전거>는 소년들의 성장통을 그린 청춘영화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중국사회의 비판적인 자화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서 베이징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북경자전거>는, <소무>가 지아장커의 눈으로 본 펭양(곧 중국사회)의 이야기였듯, 감독 왕샤오솨이의 눈으로 본 변화하는 베이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현대 중국을 향한 감독의 당혹스런 시선은 맨 마지막 장면에서 날카롭게 빛을 발한다. 피를 흘리며 자전거를 살려낸(?) 구웨이가 도로를 걸어갈 때 그 위를 덮는 것은 자동차의 물결이다. 이건 꼭 계속해서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중국에서 구웨이가 또다시 어떤 방법으로 생존해가야 할 것인가를 묻는 것 같아 가슴을 답답하게 죄어온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개봉작>북경자전거
▶ 왕샤오솨이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