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파티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테즈노부는 또 한번의 파티를 기획하는데, 이번 컨셉은 유카타다. 두 번째 유카타파티에는 요리코 선생과 나오미 외에 나오미의 동생 유미와 그녀의 남자친구까지 손님이 늘어난다. 이번에도 이들은 모노폴리를 비롯해 갖가지 게임을 즐기고 마지막으로 불꽃놀이까지 한다. 마미야 형제가 다소 동화적인 캐릭터라면 요리코나 나오미는 좀더 현실적인 인물들이다. 요리코는 같은 학교 선생과 ‘진전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 자신의 집을 공개하지 않는 남자는 요리코를 불안하게 만든다. 갓 성년이 된 나오미는 자신보다는 야구에 미쳐 있는 남자친구 때문에 속을 끓인다. 마미야 형제의 모습이나 행동이 만화적인 느낌을 주지만 이들을 둘러싼 삶이 결코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이 경쾌해서 이면의 비애 같은 것이 겉으로 배어나오지 않도록 표면을 팽팽하게 당겨놓은 느낌이다.
형 아키노부는 직장 상사의 부탁으로 그의 아내를 함께 만난다. 상사는 이혼을 하고 싶어하지만 아내가 동의를 해주지 않으니 함께 설득해 달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를 설득하는 일에 동참해보려던 아키노부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 아키노부에게 그런 삶의 현실은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상사의 아내가 차려놓은 안주의 이름과 먹는 순서 같은 게 그에게는 실감나는 대상이다. 그래서 감독은 오타쿠 기질이 다분한 이 형제의 삶을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그려내려 한다. 형제가 고향으로 엄마를 방문하러 가는 모습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형제의 엄마 역시 이들 못지않게 만화적인 외모와 언행을 보여주는 인물로 집안 내력을 짐작하게 한다.
에쿠니 가오리 소설을 영화화한 <마미야 형제>는 마치 스케치 그림처럼 일본적 일상을 무겁지 않은 터치로 묘사하고 있다. 마미야 형제의 삶은 일본적인 원형을 갖고 있다. 가지런히 정돈된 아파트 실내를 채우고 있는 신발 축소 모형들, 도감이나 사전류의 책들, 온갖 보드게임들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형제의 생활을 잘 보여준다. 요리코 선생도 나오미도 결국 자신들의 애인에게 돌아가고 형제는 다시 둘만 남는다. 이들 형제는 아직 여자가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믿을 수 없어, 우리집에 여자가 오다니…”라는 형의 탄성에 동생 테즈노부는 이런 대답으로 형을 안심시킨다. “엄마가 두명 온다고 생각해.” 영화의 초반, 두 형제가 바라보는 신칸센 열차에 써 있던 ‘Ambitious Japan’이라는 글자가 무척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가족게임>(1983), <소레카라>(1985), <키친>(1989), <실낙원>(1997), <검은집>(1999), <괭이갈매기>(2004) 등 80년대 이후 수많은 영화를 연출한 모리타 요시미쓰 감독은 매번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별다른 연출 수업을 거치지 않고 데뷔한 모리타 감독이 만든 영화들은 비평이나 흥행에서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이는 다양한 영화적 실험을 시도하지만 항상 당대 일본인의 삶을 영화에 담아내려한 그의 의도가 잘 구현된 결과 같다. 주연을 맡은 중견배우 사사키 구라노스케와 이 영화로 마이니치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한 쓰카지 무가뿐 아니라 나오미로 분한 사와지리 에리카 등 출연진들의 조합이 이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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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발생하자 당국은 한강을 통제하고 괴물과 접촉한 사람들을 격리시킨다. 사건의 국면은 괴물이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괴바이러스에 집중한다. 당국은 한강변 주변을 방역한다. 괴물 사건이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국면으로 고정되는 것은 미국(미군)이 주도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괴물퇴치를 명분으로 에이전트 옐로우를 살포할 것을 결정하고 시민단체는 이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인다. 대한민국 정부가 괴물문제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멘트는 없다.
이 영화를 만든 당년 38세의 봉준호 감독은 이십년 전이던 고3 때 우연히 잠실대교의 교각을 기어오르던 괴생물체를 목격하고, 장차 영화감독이 된다면 반드시 이것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에 미군이 한강에 독극물 포름알데히드를 무단 방류한 맥팔렌드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이야말로 자신이 고교시절부터 꿈꿔온 괴물영화를 만들 절묘한 소재라고 판단하고 사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출발은 무엇보다도 ‘한강의 괴물’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괴물의 태생이나 한강의 폭, 깊이, 은신처 같은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한강의 괴물은 고질라나 킹콩 같은 크기일 수는 없다. 그래서 괴물은 도롱뇽 같은 양서류로 설정하고 괴물의 행각은 한강과 한강변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요소들을 고려하고 나서 명색이 괴물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최대한의 크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괴물은 어떤 조건과 원인에 의한 돌연변이 생명체이지 에이리언 같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생명체는 아니다. 괴물의 태생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고질라」나 「엘리게이더」와 비슷하지 「아웃 브레이크」나 「에이리언」과는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괴물적인 요소로서는 크게 어필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아니면 감독 자신이 괴물을 내세우고 있지만 애초에 괴물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여 괴물은 실제보다는 은유와 상징으로 더 기능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괴물이 차지하는 부분을 드러내더라도 충분히 영화로서 가능하다고 했던 한 출연배우의 발언은 아주 의미심장한 언급이다.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박강두(박희봉) 가족에게 괴물이란 그들의 삶을 압박해 들어오는 사회현실이다. 감독은 괴물이란 상징을 통해 사회나 국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황량한 벌판에 외따로 서서 삶이란 버거운 현실과 맞서고 있는 한 가족의 사투를 보여 준다. 가족의 막내인 현서가 처한 현실은 지극히 운명적이고, 괴물의 출현에 있어 대한민국이란 국가권력은 한 걸음 물러나 있고 그 자리는 미국이 대신 차지하고 있다. 마치 한강의 관할권이 미국에 있는 듯하다.
공원으로 복원하기 전의 여의도광장을 생각해 보자. 예전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 한 남자가 자동차를 몰고 광장을 미친 듯이 질주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했었다. 그걸 기억하면서 한 상황을 상정해보자.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어떤 사람이 군용 장갑차를 몰고 여의도 광장에 나타났다. 주변 기물들을 마구 부수고 차량들과 충돌하고 사람들은 바퀴에 깔린다. 사람들은 장갑차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오로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뿐이다. 괴물이 한강 둔치에 출현한 사건은 이와 같다.
이것은 오로지 물리적인 사태이지 생화학적인 사건은 아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접한 당국은 엉뚱하게도 괴생물체가 지닌 바이러스에 집중한다. 죽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어떤 감염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영화의 진행이 이렇게 엇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영화가 지닌 상징이며 권력에 대한 냉소의 자세인지는 모른다. 하여튼 영화는 이 부분에서 심하게 굴절되어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종종 바다에서 고래가 어선의 그물에 걸려 죽는다. 당국이 괴물을 막거나 잡을 생각이었다면 한강에 그물을 치거나 거대한 그물을 장착한 헬리콥터 편대를 띄웠어야 한다. TV에선 최일구 앵커가 열심히 떠들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당국과 미국은 괴물을 잡을 생각이 없다. 한강변은 세상과 격리되어 있다.
당국은 방역차를 동원했다. 방역차에서 내뿜는 하얀 연기는 절대로 감염원인 바이러스를 죽이지 못한다. 연기의 실체는 살충제를 머금은 경유방울이다. 이 경유방울은 모기나 파리조차도 죽이지 못한다고 류시원이 MC 보던 호기심천국에서 이미 증명한 바 있다. 밤섬을 배경으로 몇 대의 보트에서 방역연기를 내뿜는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이 장면이「친구」에 대한 오마주 혹은 냉소가 아니라면 바이러스가 한강을 넘어 사회의 곳곳으로 안개처럼 퍼진다는 상징인지도 모른다.
당국과 미국은 새로운 방역체계를 시험할 궁리만 한다. 괴물은 그럴싸한 구실이고 좋은 명분이 된다. 하지만 바이러스도 없는데 미국은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할 작업을 왜 하려는 것일까? 미국은 괴물의 출현이 자신들의 탓이며 이에 개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작정한 것인가? 그렇다면 괴물이란 미국의 또 다른 상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