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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흔들리는 진심 <킹스 앤 퀸>

레다와 백조를 오가며 주위를 서서히 전염시키는 ‘왕비’, 그녀가 잣는 관계들

<킹스 앤 퀸>이라는 제목만 본다면, 이 영화는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궁정의 치정극일 것만 같다. 게다가 ‘왕과 왕비들’이 아니라 ‘왕들과 왕비’라는 제목은 일처다부제를 연상시키며 어쩐지 신선한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자연히 고혹적인 왕비와 그녀를 둘러싼 왕들의 인정투쟁, 치명적인 사랑과 파멸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킹스 앤 퀸>은 그러한 기대를 반은 채워주고 반은 빗나간다. 이 영화에는 왕과 왕비가 등장하지 않고 시대적 배경 또한 당대 프랑스지만, 위의 기본 구도를 세련되게 변주하고 확장시킨 듯한 인상을 준다. 여왕벌 같은 여주인공 노라(에마뉘엘 다보스)와 그녀의 수컷 벌들이 맺는 관계는 과잉된 감정, 자극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지 않는다. <킹스 앤 퀸>은 표면보다는 이면에, 등장인물의 꼿꼿한 언어보다는 그 뒤에 은폐된 흔들리는 진심을 담아내는 데 강한 영화다. 그래서 실은 현대의 팜므파탈이라고 할 만한 노라의 캐릭터도 관능적이고 자극적인 독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목소리의 변화 하나없이 가면을 쓰고 벗으며 침착한 독으로 승부하는 ‘왕비’의 형상이다.

영화 속에서 노라와 관계를 맺는 남자들은 모두 다섯명이다. 두명의 전남편들과 앞으로 남편이 될 남자, 아버지, 그리고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아마도 이 영화의 왕들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세 번째 남편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노라가 바라보는 네명의 남자들 혹은 노라의 삶에 과거, 현재, 미래로 개입하는 네 가지 삶의 순간들을 축으로 삼는다. 영화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노라가 병에 걸린 아버지를 방문하는 ‘노라’, 그녀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고 두 번째 남편, 이스마엘(매티유 아멜릭)의 에피소드가 포함된 ‘무정한(잔인한) 해방’, 마지막으로 노라의 아들과 이스마엘의 대화로 채워지는 ‘에필로그’가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부분은 노라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이면이 드러나는 두 번째 이야기다. 이 부분은 마치 나머지 두개의 에피소드와 단절된 느낌을 줄 정도로 그 자체로 복합적인 형식과 다채로운 인물들의 캐릭터를 안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열쇠가 되는 것은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등장한 제우스와 레다의 신화다. 영화는 제우스가 레다와 동침하기 위해 백조로 변신한 신화를 들려주고, 곧이어 레다와 백조의 신화에 대한 그림을 보여준 바 있다. 노라는 그 그림을 아버지에게 줄 선물로 챙긴다. 일면 난데없어 보이는 이 신화는 무수한 곁가지로 뻗어나가는 영화 속 이야기들에 해석의 틀을 제공해준다.

이를테면, 우리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킹스 앤 퀸>에서 순진한 레다를 유혹한 백조는 누구일가? 첫 번째 이야기에서 노라가 자신의 과거를 간명하게 들려줄 때, 그녀는 상처 입은 레다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두 번째 파트에서 그녀의 과거가 현재에 삽입될 때, 그녀는 주위의 남자들을 교환하며 끊임없이 변신하는 가면 쓴 백조처럼 보인다. 더욱이 영화 후반부에, “네명의 남자들을 사랑했다. 그중에서 내가 두명을 죽였다”는 노라의 고백은(설령 그녀가 그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킹스 앤 퀸>에서 누가 레다이고 누가 백조인지를 따지는 것은 그다지 의미있는 접근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감독 데스플레생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노라가, 나아가 영화 속 인물들 모두가 레다와 백조를 ‘오가는’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들은 이들이 삶의 진실을 대면하고 내면화하는 방식과 관련된다.

누벨바그 이래 프랑스 영화계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는 데스플레생은 주로 개인적인 주제를 문학적으로 표현해내는 작가로 평가받아왔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대부분 ‘고백’이라는 화두를 중심에 둔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그는 여러 인물들의 시선을 교차시키고 그 시선의 충돌과 공존을 통해 영화를 진행하는 데 능하다. 이 영화에서도 인물들은 모두 나름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고 그것이 각각의 고백이 되어 실타래처럼 얽혀가며 관계가 형성된다. 순수와 위선, 삶과 죽음,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은 교차되고 공간적 배경 또한 집과 정신병원을 오간다. 가장 극단적인 두 지점은 사실 자신 안에 그 반대의 지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데스플레생은 여기에 힙합과 클래식을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의 배경음악을 깔고 다큐멘터리에서 판타지에 이르는 틀을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게 한다. 한마디로 그의 영화는 혼종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데스플레생이 이처럼 복합적인 내용과 형식의 정확한 교차나 꽉 짜인 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교차의 틈에서 인물들의 결핍을 보고 있다. 그 지점에서 인물들의 이성적 판단 이면에 존재하는 죄의식과 도덕적 자괴감, 사랑으로 은폐된 증오와 광기를 발견한다. 그가 보는 것은 진정한 고백의 윤리가 아니라, 고백이라는 가면이 숨기고 있는 다른 무엇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두 남자의 죽음을 거쳐 마침내 평온을 찾은 ‘왕비’의 성장기이자 ‘백조’의 가면을 쓴 인간들의 이중적인 언어, 내면, 행위의 분열을 응시하는 냉정한 관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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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 hulove
    2007-01-10 18:40:11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본 괴물에서의 상징 : 괴물 = 자본주의, 미국 또는 미군, 괴물같은 자본주의, 환경오염. 가족 = 소시민, 항상 당하고만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 강두네 가족 = 현실부적응자, 소외된 존재들, 3류. 현서 = 유일한 희망. 한강 = 삶의 공간, 서울, 대한민국. 남일의 선배 = 국민을 배신한 386. 뼈(인골) = 괴물(자본주의, 국가, 미국)에게 살과 피(고혈)를 다 빨아 먹힌 우리들. 데모대 = 21세기 데모대. 에이젼트엘로우 =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시키기 위한 미국 혹은 다국적 기업의 도구, 지극히 미국적이고 자본적인 도구, 베트남전의 고엽제?, 슈퍼 박테리아의 내성을 더 키워주는 항생제. 남일의 화염병 = 80년대의 무기, 정밀하지 못한 분노의 무기. 남주의 화살 = 느리지만 정확한 타격, 괴물의 눈알(자본주의의, 혹은 미국의 심장부)을 꿰뜷은 무기,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1. 강두의 큰 쇠파이프 = 쇠파이프, 민중의 힘,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2. 괴물의 죽음 = 자본주의, 미국의 종말(까지는 아니겠지만). 현서의 죽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나지 않는 희생. 엔딩 = 가족의 복원,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을 원하는 우리들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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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oreamed
    2006-08-24 17:45:04
    한강에 괴물이 출현했다. 그 괴물은 백주대낮에 나타나 한강변의 시민들을 공격하고 죽이고 잡아먹고 납치해 간다. 그 괴물은 미군 영안실에서 한강으로 통하는 하수구에 무단 방류한 포름알데히드에 의해 돌연변이를 일으켜 기형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중생물체이다. 그 괴물은 어느 날 우연히 한강다리에서 떨어진 남자를 받아먹고 인육에 탐닉하게 된다.



    사건이 발생하자 당국은 한강을 통제하고 괴물과 접촉한 사람들을 격리시킨다. 사건의 국면은 괴물이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괴바이러스에 집중한다. 당국은 한강변 주변을 방역한다. 괴물 사건이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국면으로 고정되는 것은 미국(미군)이 주도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괴물퇴치를 명분으로 에이전트 옐로우를 살포할 것을 결정하고 시민단체는 이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인다. 대한민국 정부가 괴물문제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멘트는 없다.

    이 영화를 만든 당년 38세의 봉준호 감독은 이십년 전이던 고3 때 우연히 잠실대교의 교각을 기어오르던 괴생물체를 목격하고, 장차 영화감독이 된다면 반드시 이것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에 미군이 한강에 독극물 포름알데히드를 무단 방류한 맥팔렌드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이야말로 자신이 고교시절부터 꿈꿔온 괴물영화를 만들 절묘한 소재라고 판단하고 사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출발은 무엇보다도 ‘한강의 괴물’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괴물의 태생이나 한강의 폭, 깊이, 은신처 같은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한강의 괴물은 고질라나 킹콩 같은 크기일 수는 없다. 그래서 괴물은 도롱뇽 같은 양서류로 설정하고 괴물의 행각은 한강과 한강변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요소들을 고려하고 나서 명색이 괴물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최대한의 크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괴물은 어떤 조건과 원인에 의한 돌연변이 생명체이지 에이리언 같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생명체는 아니다. 괴물의 태생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고질라」나 「엘리게이더」와 비슷하지 「아웃 브레이크」나 「에이리언」과는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괴물적인 요소로서는 크게 어필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아니면 감독 자신이 괴물을 내세우고 있지만 애초에 괴물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여 괴물은 실제보다는 은유와 상징으로 더 기능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괴물이 차지하는 부분을 드러내더라도 충분히 영화로서 가능하다고 했던 한 출연배우의 발언은 아주 의미심장한 언급이다.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박강두(박희봉) 가족에게 괴물이란 그들의 삶을 압박해 들어오는 사회현실이다. 감독은 괴물이란 상징을 통해 사회나 국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황량한 벌판에 외따로 서서 삶이란 버거운 현실과 맞서고 있는 한 가족의 사투를 보여 준다. 가족의 막내인 현서가 처한 현실은 지극히 운명적이고, 괴물의 출현에 있어 대한민국이란 국가권력은 한 걸음 물러나 있고 그 자리는 미국이 대신 차지하고 있다. 마치 한강의 관할권이 미국에 있는 듯하다.



    공원으로 복원하기 전의 여의도광장을 생각해 보자. 예전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 한 남자가 자동차를 몰고 광장을 미친 듯이 질주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했었다. 그걸 기억하면서 한 상황을 상정해보자.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어떤 사람이 군용 장갑차를 몰고 여의도 광장에 나타났다. 주변 기물들을 마구 부수고 차량들과 충돌하고 사람들은 바퀴에 깔린다. 사람들은 장갑차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오로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뿐이다. 괴물이 한강 둔치에 출현한 사건은 이와 같다.



    이것은 오로지 물리적인 사태이지 생화학적인 사건은 아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접한 당국은 엉뚱하게도 괴생물체가 지닌 바이러스에 집중한다. 죽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어떤 감염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영화의 진행이 이렇게 엇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영화가 지닌 상징이며 권력에 대한 냉소의 자세인지는 모른다. 하여튼 영화는 이 부분에서 심하게 굴절되어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종종 바다에서 고래가 어선의 그물에 걸려 죽는다. 당국이 괴물을 막거나 잡을 생각이었다면 한강에 그물을 치거나 거대한 그물을 장착한 헬리콥터 편대를 띄웠어야 한다. TV에선 최일구 앵커가 열심히 떠들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당국과 미국은 괴물을 잡을 생각이 없다. 한강변은 세상과 격리되어 있다.



    당국은 방역차를 동원했다. 방역차에서 내뿜는 하얀 연기는 절대로 감염원인 바이러스를 죽이지 못한다. 연기의 실체는 살충제를 머금은 경유방울이다. 이 경유방울은 모기나 파리조차도 죽이지 못한다고 류시원이 MC 보던 호기심천국에서 이미 증명한 바 있다. 밤섬을 배경으로 몇 대의 보트에서 방역연기를 내뿜는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이 장면이「친구」에 대한 오마주 혹은 냉소가 아니라면 바이러스가 한강을 넘어 사회의 곳곳으로 안개처럼 퍼진다는 상징인지도 모른다.



    당국과 미국은 새로운 방역체계를 시험할 궁리만 한다. 괴물은 그럴싸한 구실이고 좋은 명분이 된다. 하지만 바이러스도 없는데 미국은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할 작업을 왜 하려는 것일까? 미국은 괴물의 출현이 자신들의 탓이며 이에 개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작정한 것인가? 그렇다면 괴물이란 미국의 또 다른 상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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