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속에 푹 빠진 천재들의 삶은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혹적이지만, 같이 살아가야 하는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난감한 존재이다. 때로는 그들의 지나친 열정이, 때로는 그들의 지독한 순수성이 그들을 세상과 담쌓은 ‘유리 동물원’ 속의 인물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빙 줄리아>의 줄리아 역시 그런 매혹과 난감함을 동시에 선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패왕별희>의 데이처럼 처연한 빛깔이 흐르지 않는 것은 경극배우 데이가 20세기 초반의 격동적인 역사에 휘말렸던 것과 달리 그녀는 1930년대 런던의 화려한 무대 위를 누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반 자보가 포착한 줄리아의 위기는 그녀를 둘러싼 외부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욕망과 사랑이라는 그녀의 내면으로부터 온다.
1938년 런던의 한 연극무대, 당대 최고의 여배우 줄리아 램버트(아네트 베닝)가 열연을 펼치고 관객은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무대 뒤의 그녀는 심리적, 육체적 고갈 상태에 빠져 있다. 그녀의 남편이자 연극제작자인 마이클(제레미 아이언스)은 극장의 영리를 도모하기 위해 그녀의 짜증을 유들유들하게 받아넘기며 그녀를 독려한다. 그러나 남편의 격려도 투자자의 탐욕스러운 시선도, 그녀에겐 어떤 의욕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낡고 오래된 시선이 아니라, 낯설고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갑작스럽게 등장한 풋내기 미국 청년의 열렬한 구애로 인해 그녀의 삶은 다시 활력을 되찾는다. 가족들과 호사가들의 눈을 피해 시작된 둘의 위험한 연애는 그녀가 다시 한번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줄리아의 ‘톰’(젊은 애인의 이름이자 애칭)은 그녀의 예술적 뮤즈이자, 육체적 연인이다. 물론 그는 중년 여성의 완숙미에 금세 싫증을 느끼고 파릇파릇한 여성을 찾아 날아가기 위해 날개를 파닥거린다. 나이 든 여성이 젊은 애인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결국은 그의 변심 때문에 조바심내고 자신의 노쇠한 육체를 초라하게 여기는 것은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진부한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뻔한 레퍼토리이다. 하지만 <빙 줄리아>에서 줄리아는 자신의 현실적 연인에 완전히 눈멀거나, 그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무모한 여성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줄리아의 궁극적인 애인은 그녀를 처음으로 발탁하고 키워준 연출가 지미 랭튼으로 육화된, ‘연극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실제 지미는 죽었지만, 그는 줄리아의 무대 위의 삶과 무대 밖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적 지주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중년 여인의 위기와 사랑을 다룬 멜로드라마로 함몰되지 않는 것은 줄리아가 보여주는 예술가적 초상 때문이다. 그녀는 현실의 삶과 연극을 분리시킬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가 애인 혹은 가족에게서 받은 에너지는 온존하게 무대 속 연극적 에너지로 전환되고, 연극 속의 대사는 현실 곳곳에서 투영된다. 그녀의 삶과 연극은 무엇이 진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서로를 시뮬라시옹한다. 이때 줄리아가 그 두개의 삶을 조정하는 방향키로 삼는 것은 오래전에 세상을 뜬 지미 랭튼의 환영이다. 지미 랭튼은 계속해서 연극배우에게 연극이 삶이며,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만이 ‘진정한 현실’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제목인 ‘빙 줄리아’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줄리아인 것’인데, 이것은 영화의 전반부에 강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조울증에 가까운 줄리아의 변덕스러운 성격과 연극 본위의 삶을 ‘줄리아다운 삶’이라고 규정한다. 그녀 스스로도 연극배우 줄리아로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녀는 다양한 연령대를 넘나드는 헤로인으로서의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혹시라도 살이 붙을까봐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맥주 한잔까지도 자제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서서히 ‘줄리아인 것’이 진정한 자아정체성을 유지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지미 랭튼이 그녀에게 주입한 연극배우 줄리아 램버트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영화의 후반부에 오면 ‘빙 줄리아’는 ‘줄리아 되기’로 의미가 바뀐다. ‘being’이 점차 ‘becoming’의 의미를 얻기 시작하는 것이다. 애인의 변심과 그로 인한 정신의 피폐 때문에 연기마저도 흔들리게 되자,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진실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절대적인 후원자이자 친구인 찰스의 본질과, 순진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들의 속내 그리고 자신과 톰, 그의 젊은 애인 에비스 그리고 남편 마이클을 둘러싼 애정 지형도의 실상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연극에 파묻혀서 보지 못했던 현실을 보게 된다. 그녀는 연극 본위의 삶에서 벗어나 현실의 욕망을 바탕으로 연극을 스스로 주조하기에 이른다. 남들이 써주는 대본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나가던 줄리아가 스스로 연출가 그리고 극작가로 변모하여 보여주는 최종 연극 시퀀스는 줄리아의 통쾌한 승리이자, 자신을 억압하던 지미 랭튼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공연을 마치고 들이켜는 시원한 맥주 한잔과 함께 연극배우 줄리아 램버트는 인간 줄리아로 새롭게 태어난다.
<메피스토>와 <미팅 비너스> 등을 통해 예술가의 내면적 갈등을 조망해왔던 이스트반 자보는 <빙 줄리아>에서 좀더 가벼운 터치로 연극배우 줄리아의 내면에 접근한다. 서머싯 몸의 <극장>(Theater)을 각색하여 만든 이 영화는 코믹적인 요소가 강하게 깔려 있지만, 연극과 현실 사이에서 정체성을 혼동하는 여배우의 내면이 잘 드러난다. 주름진 얼굴이 더 아름다운 아네트 베닝은 중년의 위기를 맞은 줄리아의 오묘한 아우라를 절묘하게 뿜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