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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느리고 적막한 정형시 같은 영화, <당시>
이종도 2005-05-17

당시의 형식 안으로 카메라가 스며들었다. 아주 느리고 고요하게.

제한된 형식으로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하는 게 정형시다. 기껏해야 스무자, 스물다섯자에 불과한 오언(五言)절구는 몇개의 낱말로 우주와 인간을 담아낸다. 결구의 짧고 간결한 맺음은 긴 여운을 이끌어내지만 어떻게 보면 느닷없기도 하다. <당시>는 그런 영화다. <당시>를 즐기려면 문자 하나하나에 파묻혀야 하고, 구에서 구로 넘어가는 사다리를 조심스레 타야 한다. 등장인물의 작은 몸짓 하나에 줄거리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꽃 지고 바람 부는 서정성 넘치는 작품이라 넘겨짚으면 안 된다.

자막이나 크레딧 없이 <당시> TV 강연 프로그램 소리를 들려주며 첫장이 열린다. 이윽고 전화벨과 초인종 같은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의 소리들이 화면을 채운다. 카메라는 아파트 복도와 실내 바깥으로 벗어나는 법이 없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피사체에 집중한다. 카메라가 골똘히 잡아내는 건 손을 떠는 한 중년 남자와 춤을 추는 나이든 여자다. 남자의 일상은 도어록 교체, 화초에 물주기, <당시> 프로그램 보기, 손 씻기가 전부다. 집 안은 달랑 TV와 냉장고가 지키고 있다. 그리고 뜬금없이 맹호연의 ‘봄날새벽’이 뜬다. 봄잠에 새벽 오는 줄도 몰랐는데/ 곳곳에 새 우는 소리 들리네/ 간밤 비바람 소리 들렸는데/ 꽃은 얼마나 떨어졌을꼬.

아, 이제 이 남자가 창문을 열면 떨어진 꽃과 비바람에 시달린 나무들이 보이겠구나 그리고 이 남자의 인생이 나오겠구나. 그런데 웬걸, 영화는 시를 보여준 뒤에도 정색하고 느린 리듬과 정적으로 남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관한다. 그런데 여기엔 미세한 변화가 있다. 선생님, 창백해 보이십니다라며 말을 거는 보험판매원, 벌써 자정인데 자꾸 전화를 걸어 미안하구나라고 말하는 불면증 걸린 옆집 노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건 털자는 여자의 말이 남자의 삶에 개입한다. 마치 비바람 불어 꽃 한 송이씩 떨어지듯,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그 느린 변화는 마지막에 과연 무엇이 찾아올지를 궁금하게 한다. 이토록 한없이 느리고 적막한 영화에 긴장이 생기는 것이다. 짧은 글에 봄의 우주를 리듬감 넘치게 담은 맹호연과 달리 이 영화는 긴 시간 안에 옹색하고 지루하게 겨우 두 전직 소매치기의 망설임을 담은 게 아니냐는 불만이 나올 법하지만 말이다. 재중동포 장률의 첫 번째 장편으로 중국 문학 3부작인 <당시> <송사> <원곡> 가운데 첫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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