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제이 보고서>는 센세이셔널하지 않다. 성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통계내는 킨지 보고서의 본질처럼 영화 역시 성적 욕망에 대한 활화산 같은 시선 대신, 건조하고 지극히 ‘보고서’적인 시선을 택한다. 그것은 영화의 초점이 킨지 보고서의 질문과 답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언어를 수집하여 숫자를 매기는 연구자들에게 맞춰져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시대를 너무 앞서 살아 피로했던 인간 킨지가 있다. 성 해방론자, 성 개척자와 부도덕한 연구자, 신을 거스르는 섹스주의자 사이를 오갔던 인물. 이미 반세기 전, 1만2천명의 입을 열게 하여 그들의 ‘낯 뜨거운’ 성행위를 낱낱이 밝혀낸 인물.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럽다고 일컬어지던 영역을 단순한 숫자로, 명료한 문장으로 정리해낸 인물. 영화는 이 희대의 인물을 전혀 모나지 않은 방식, 어찌보면 지극히 전형적인 전기적 구조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영화가 택한 킨지 일생의 순간들은 그가 설파했던 다양하고 극적인 체위와 달리 일관성과 인과성, 심지어 기승전결의 구도를 따른다. 그가 엄격한 아버지를 피해 엔지니어 대신 동물학 교수가 된 순간부터 세계적인 성 전문가가 되기까지의 우여곡절 과정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기본구조가 탄탄히 자리매김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성이라는 답이 없는 무언의 욕망을 전면으로 내세우면서도 언제나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화면으로 부활한 킨지의 삶에는 극적인 장치나 격렬한 논쟁거리나 극단적인 우연의 사건들이 없다. 천재 수학자를 다루었던 <뷰티풀 마인드>식의 현실을 벗어난 영화적 드라마도 없다. 과학적 ‘사실’(fact)에 대한 킨지의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반영하듯, 감독 빌 콘돈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이해되는 무난한 이야기와 화면들로 영화를 구성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킨지 보고서라는 충격적인 이슈 이면에서 외로운 연구자 킨지를 발견하며 성에 대한 그의 집착을 도착증을 넘어 학술적인 열정으로 승화시킨다.
빌 콘돈이 킨지의 삶을 다루는 데 있어서 관심을 두는 부분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킨지 보고서라는 성에 대한 끈질긴 탐구의 근원을 추적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탐구의 과정을 면밀히 응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킨지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청교도적인 목사 아버지의 영향에서 시작된다. 금욕과 청빈함을 강요하며 킨지의 어린 시절을 구속했던 아버지의 존재는 킨지가 결혼을 하여 첫날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성적 억압의 근원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죄의식과 억압에서 탈출하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은 그를 인간의 성적 자유를 외치는 급진적 전도사로 이끌게 된다. 성적 편견과 무지와 상처에 갇힌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 또한 사회적 관습의 피해자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콘돈은 킨지 보고서가 탄생하는 과정을 사회적 금기라는 거대한 아버지의 억압과 충돌하는 과정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처럼 ‘억압된 성적 욕망과 아버지’라는 정신분석학적인 이슈는 분명 이 영화의 모태가 된다. 게다가 어린 시절 가족과의 관계, 종교적 정체성, 첫 몽정 등에 대한 질문을 기반으로 인간의 성적 행위를 분석하는 보고서 역시 현재의 자신을 과거의 무의식적 경험, 기억에 근거해 설명하는 정신분석학과 닮았다. 그러나 킨지의 관심은 인간의 심리가 아닌 성 행위 그 자체에 놓여 있다. 성기의 길이, 오르가슴의 횟수, 체위의 다양한 방식에서 혼외정사, 동성애의 경험 등에 이르는 사실들의 홍수 속에서 그 행위의 다양한 동기는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연구방식은 킨지의 수집가적 면모를 통해 설득력을 획득한다. 이를테면, 혹벌(gall wasp) 100만 마리를 수집하여 그들의 다양한 생태방식을 연구하던 동물학자가 그 관심을 인간의 성으로 돌렸다고 해서, 다시 말해, 인간의 심리가 아닌 인간의 근원적인 생태 현상으로 관심을 옮겼다고 해서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영화는 킨지의 무차별적인 수집가적 행태가 성적 억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생명에 대한 예찬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간간이 제시함으로써 그에게 도덕성을 실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행위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킨지 역시 통계를 통한 수량화가 초래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는 성의 일반화에 반대하는 연구로 성적 행위에 대한 보편적 결과를 도출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에 대한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실험용 생쥐가 되어버린 연구자들의 갈등과 감정이 배제되어 기능만 남은 성 행위, 관념과 언어로 분해되고 환원되는 쾌락에 대한 문제의식은 잠시 드러났다 곧 사라진다. 대신 그 자리에는 킨지의 순수한 탐구욕을 매카시즘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정치의 비열함, 즉 또다시 고개를 든 ‘아버지’의 억압이 들어선다. 콘돈은 영화 마지막까지 킨지에 대한 연민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마이클 콜린스, 쉰들러에 이어 킨지로 분한 리암 니슨의 세심한 연기가 한몫을 한다. 켄 터커(<뉴욕 매거진>)의 말대로,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역사적 인물들의 극단적 삶에 인간적 숨결을 불어넣는 재능을 발휘한다.
어찌됐건, 성적 욕망의 끈적거리는 기름기가 빠지고 생식기만 남은 듯한 이 다큐 같은 영화는 성교육이란 성병교육도, 위생학도 아니라는, 고리타분하지만 현재 진행형인 진리를 전달한다. 그런데 이 진리를 설파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성이 고백되고 관찰당하고 분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드는 생각. ‘Who Cares?’ 물론 이건 제대로 된 성 담론조차 없는 이 사회에서 여전히 과분한 생각이지만 말이다.
킨지 보고서
기존의 성 담론을 반박한 혁명적 보고서
앨프리드 킨지(1894∼1956)의 킨지 보고서는 미국 전역에 걸쳐 실시된 1만2천명에 대한 면접 결과를 바탕으로 한다. 보고서는 이후 두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한권은 다양한 연령, 직업, 인종으로 구성된 5300명의 남성에 대한 면접 자료가 기초가 되어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in the Human Male, 1948)이라는 제목으로, 또 한권은 5년 뒤, 594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인간 여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in the Human Female)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영화에서 드러나듯, 이 책들은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킨지를 세계적인 성 전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다. 그의 책은 남성 성기 중심의 성윤리나 변태성욕이라 치부되던 성에 관한 다양한 이슈들이 단지 사회의 억압적 관습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남자들이 이미 동성애와 이성애의 경계를 오가고 있으며 순결의 굴레에 묶여 있던 당대의 여성들이 혼전과 혼외정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공론화시켜 기존의 성 담론에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킨지의 통계는 불규칙한 표본추출과 보편성의 적용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 여성의 성적 행동>이 출간되던 1953년은 <플레이보이>가 창간되던 해이기도 하다는 것. 이들은 모두 10만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한쪽이 성에 대한 편견, 환상을 분석하여 수량화했다면, 다른 한쪽은 성에 대한 전형적인 환상, 그림을 끊임없이 생산해냈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미국사회가 이 두개의 노골적인 성 담론 중 킨지의 책을 비난의 표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