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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취하고 사랑을 갈망하던 스무살, <몽상가들>
김용언 2005-03-22

68혁명 한복판에 위태롭게 세워진 영화광들의 매혹적인 ‘열정의 제국’.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단단히 결합된 쌍둥이 남매와 그들 사이에 끼어든 소년. <몽상가들>의 전제는 장 콕토의 중편 <무서운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전후 프랑스의 악마적인 청춘들을 차갑게 묘사한 <무서운 아이들>과는 달리 <몽상가들>은 혁명의 한복판에서 자신들만의 낙원을 건설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몽정기’에 더욱 가깝다.

<몽상가들>은 이자벨과 테오, 매튜가 홀린 듯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앙리 랑글루아가 시네마테크 관장직에서 해임되고 68혁명이 시작되면서 아이들은 아파트 안에 틀어박힌다. 그들은 이제 흑백 여배우 사진 앞에서 자위하거나 ‘모션퀴’를 통해 영화 지식을 시험하고, 자살을 시도할 때조차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린다. 그건 거의 오로지 영화를 향한, 영화에 의한 시간(屍姦)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삶의 리얼리티와 혁명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통해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무엇이었다(여기서 떠오르는 영화는 드니 아르캉의 <야만적 침략>이다. “결국 바보 같은 우리는 고다르의 영화 몇편만 보고 문화혁명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거지.”).

이를테면 이 영화는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과 반대의 전략을 취한다. 전장으로 향하는 군대의 행렬과 마주친 남자는, 그것을 외면하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죽을 때까지 섹스에만 탐닉했다. 하지만 <몽상가들>의 그들은 극장 안에, 아파트 안에, 텐트 안에, 그렇게 자신들만의 꿈의 세계에 머무르다가 마지막에서야 거리로 뛰쳐나와 화염병을 던진다. 일종의 연기처럼 보일 정도로 즉흥적인 그 행위는 집단 열기에 휩싸인 ‘이끌림’일 수 있었음을 베르톨루치는 고백한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나 비판의 어조가 아니라 마치 ‘내가 스무살 때 저랬다. 근데 대부분 그렇지 않았나?’라고 되묻는 제스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몽상가들>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무척이나 진부하고 저열한 비유이겠으나 ‘영화에 처녀성을 바치는’ 경험의 그 두근거림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극장 맨 앞줄에 앉았다. 이미지가 여전히 새롭고 신선할 때 가장 먼저 받아들이기 위해….” <몽상가들>은 숨막히도록 아름답고, 영화광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용의 포화’의 영화다. “너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겠어. 너는 이제 우리 중 한명이야.” 영화에 취하고 사랑을 갈망하던 스무살, 그들만의 프리메이슨-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런 기억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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