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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시대의 기원전 역사 다시 쓰기, <알렉산더>
이종도 2004-12-28

부시 시대의 기원전 역사 다시 쓰기. 그 결과는 자유를 전파하겠노라는 계몽에의 의지와 그뒤에 숨은 죄의식 사이의 파열음.

‘운명은 용기있는 자를 선택한다’는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를 영화의 첫머리로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올리버 스톤 감독뿐 아니라 감독이 설파하는 고대사에 감동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라면 이 시구는 세 시간에 가까운 대서사시를 열어젖히는 출입문으로는 제격이다. 팍스 로마나의 정점이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그리스와 로마인의 용기를 칭송하는 것이나,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2400년 전 그리스 북부 출신의 정복자의 용기를 1억5천만달러를 들여 되새기는 데는 어떤 역사적 일관성이 관통하는 듯하다. 영화 속에는 통주저음처럼, 세상에 자유를 전파해야 한다는 식의 조지 부시적 이데올로기이자 강박관념이 희미하게 울린다. 알렉산더의 전기를 쓰기도 했으며 알렉산더의 장수 출신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창시자인 프톨레마이오스(앤서니 홉킨스, 천문학자는 동명이인)가 이 거대한 서사시를 말해줄 변사이다. 권위있는 옥스퍼드식 표준 영어로 흘러나오는 연대기는 알렉산더(콜린 파렐)의 서른셋 짧은 삶을 인간의 운명을 변화시킨 프로메테우스로 격상시킨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영웅적 삶은 웅장한 대관식처럼 연출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한쪽 눈에 깊은 상처를 받은 주정뱅이이자 폭군인 아버지 필립포스 2세(발 킬머)와 아버지에게 늘 복수를 벼르며 뱀과 함께 사는 이방인 출신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안젤리나 졸리) 사이에서 짓눌려 있는 젊은이의 초상이다. 영화가 연대기적 구성을 택했음에도 우리가 세계 정복의 지도가 아니라 알렉산더의 내면의 지도에 더 눈길이 쏠리는 까닭이다. 마치 모순에 가득한 알렉산더의 삶을 모순적으로 그려내겠다는 듯이, 올리버 스톤은 직선적인 역사보다는 좀더 모호하고 음영 짙은 문자를 양피지에서 얻어낸다.

호메로스의 애독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라는 지적인 면모를 콜린 파렐에게 기대하기 어려웠던 탓일까. 올리버 스톤이 잡아낸 알렉산더의 초상은 부모가 할퀴고 간 상처투성이의 초상이다. 아버지에겐 ‘너는 자식도 아냐’라는 말을 듣고, 권력의 화신 같은 어머니에게 휘둘리면서 알렉산더의 적개심은 외부로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세계 정복이 동방의 압제자로부터의 해방이자 동양과 서양을 잇는 교량 건설이라는 영화 속 연설 속엔 큰 공명이 없다.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25만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불과 4만의 군사로 대적할 때, 알렉산더는 ‘우리는 자유로운 마케도니아인’이라는 소명을 앞세우지만 먼지 휘날리는 현실감 넘치는 전쟁장면에서 그런 대의명분은 말발굽 소리와 창 부딪치는 소리 사이에 파묻혀버린다. 알렉산더의 심란한 가정사는 보았으되 그의 지적인 세계와 비전에 대해선 영화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라 이름 지은 70개의 도시 대신 25만명을 이끌고도 도망가기에 바쁜 다리우스 3세와 학살당하는 인도의 코끼리 부대와 알렉산더에게 강간당하는 고산족 여인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알렉산더의 원정이 자유의 전파라는 계몽에의 의지는 강력하게 전달되지만 그 계몽의 내용은 거의 찾기 어렵다. 원정의 주요 순간마다 올림픽 로고송처럼 울려퍼지는 반젤리스의 음악이 더해지면 부시 이데올로기의 선전영화로 오해받을 소지마저 풍긴다. 알렉산더의 불우한 오이디푸스적 개인사에 빠져들만 하면 앤서니 홉킨스의 내레이션이 감상의 흐름을 불쑥 막는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타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자유를 전파하는 일은 가능할까. 오히려 알렉산더가 우리의 사고를 건드리는 지점은 이곳이다. 알렉산더는 모순적인 한 인간의 삶을 모순적으로 묘사하며, 역으로 정복 활동의 자기 합리화에 대한 강박관념을 노출한다. 부친살해의 죄의식과 남근을 가진 여성인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알렉산더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그의 동성애 못지않게 흥미롭다. 그러나 이런 지적인 흥미를 위해 세 시간을 바치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은 아닐 듯하다. 대왕의 동방 원정이 아시아 내부로 들어갈수록 동방인의 피부색은 검어지고 할애된 대사가 적어지고 카메라의 관심마저 박탈당할 때 자기도 모르게 민감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설령 이런 인종주의적인 감정에 초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텍스트의 불균질함은 인내심의 한계를 여러 번 묻는다. 가령 알렉산더에 맞서 일개 병사들이 원정의 피로함을 하소연하고 대왕을 비난하는 아수라장 같은 대목이 그렇다. 그때 마침 한껏 고양되어 울려퍼지는 반젤리스의 음악은 관객의 운명과 용기를 조롱하는 듯하다.

::올리버 스톤의 <알렉산더>&‘알렉산더’ 변호

“알렉산더라면 빈 라덴을 끝까지 추적했을 것이다”

<가디언>은 최근 올리버 스톤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8)에서 터키 감옥의 조건을 과장되게 그린 것에 대해 사과했다고 전했다. <알렉산더>는 그의 의욕적인 베트남 삼부작에 숨은 정치적 무의식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부시 시대에 접어들어 그의 인성이나 정치관도 큰 변화를 겪은 듯하다. 그는 그러나 한결같이 모든 인터뷰에서 <알렉산더>와 부시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부인했다.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부시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건 놀라운 우연일 뿐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건 영화가 나보다, 콜린 파렐보다, 우리 모두보다 위대하기 때문이다. 스물여섯에 세상을 경영하다니, 알렉산더만한 인물이 그뒤로 또 있었는가” 하는 게 올리버 스톤의 생각이다. 한 인터넷 사이트(IGN.com)와의 인터뷰에선 그는 격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주춤거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으며, 특히 조약을 깬 빌어먹을(fuck) 놈들은 꼭 추적을 했다. 그라면 절대 오사마 빈 라덴을 도망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키스탄 국경이라도 넘었을 것이다. 국경은 무슨 놈의 국경. 미국은 정말 국경을 넘어서 그 지역으로 갔어야 했다. 부시가 알렉산더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아마 이제 그의 차례인 것 같은데.”

<시카고 트리뷴>에서의 변호는 조금 더 이성적이지만 그의 동방에 대한 견해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올리버 스톤은 여느 영화보다 <알렉산더>가 동서양의 역학관계를 크게 부각하고 있고, 현대와 알렉산더 시대가 대칭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미국인들은 동양에 또 다른 제국을 세우고 있는데 그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아마도 이란과 남부 러시아의 석유를 통해서 굴러가는 제국으로 보인다. (조지 부시가) 200년 안에 부시 대왕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 (알렉산더 시대에 있었던 일이)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다시 순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시카고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로 언제나 원하던 것을 마침내 이뤘다고 했다. 그의 영화적 신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한 농담처럼, 비평적 관점에서는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 같은, 재앙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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