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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도시의 밤에 찾아온 악몽, <콜래트럴>
이종도 2004-10-12

도시라는 익명의 섬에 사는 당신이라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악몽. 마이클 만의 가장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스릴러.

택시를 하루 전세 내 밤새 도심을 돌겠다는 평범하지 않은 손님이 있다. 소금과 후추를 적당히 섞어 뿌린 듯한 회색빛 머리칼, 딱 달라붙는 고급 회색 슈트를 입은 이 정체불명의 사내는 빈센트(톰 크루즈)다. 이런 손님이라면 택시운전사 맥스(제이미 폭스)가 제격일 것이다. 노스스프링에서 유니온까지는 7분, 베니스까지는 3분. LA 시내 구간구간의 소요시간을 빠삭하게 외우고 있으니 말이다.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10시간 안에 도심 다섯 군데를 돌며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강행군이라면 이런 프로페셔널 운전사를 골라야 한다.

택시가 LA 야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심도 깊은 카메라로 잡아낸 이국적인 대도시의 밤풍경을 보라. 부감으로 잡아낸 풍경 속엔 밤하늘에 흩뿌린 듯한 빌딩의 노란 불빛과 바람에 고요히 흔들리는 야자수가 어울려 고즈넉함을 자아낸다. 여기에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 재즈로 편곡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넘실댄다.

<G선상의 아리아>가 끝나자마자, 택시 위로 쿵 하고 둔중한 소리가 나는 동시에 앞 유리창이 깨지고, 근심없어 보이던 도심의 풍경화에 핏방울이 튄다. “넓기만 하고 삭막해서 정을 붙일 수 없는 도시”라는 빈센트의 투덜거림이 어쩐지 불길했다. 1700만명의 다인종 인구가 북적대는 도시, LA 여러 빛깔의 피부와 여러 다양한 냄새가 들끓는 이 대도시의 야경은 기시감을 안긴다. 마이클 만의 1995년작 <히트>는 지하철 장면에서 시작, LAX공항에서 끝났다. 그는 9년 만에 다시 이 도시로 돌아와 LAX공항에서 문을 열고 지하철에서 문을 닫는다. 대로를 막고 벌어지는 경찰과 갱의 도심전으로 후끈거리는 도심의 열기를 전했던 그는 이번엔 600명의 엑스트라들이 발디딜 틈 없이 춤을 추는 나이트클럽에서 총격전을 펼친다. <히트>에서 정유소, 사막 같은 주차장, 컨테이너 기지, 격납고 등 황량하고 거친 LA 공간을 그릴 때 마이클 만은 도시의 화가이자 시인이었다. 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나게 한 알 파치노의 경찰서 내부와 로버트 드 니로의 짙은 푸른색 통유리집은 인물과 도시의 관계에 대해 마이클 만이 얼마나 날카로운 감식안의 소유자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 아니던가.

오후 6시에서 이튿날 새벽 4시까지, 기사와 승객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숨막히는 긴장이 마이클 만이 담아낸 전부지만, LA 아스팔트 위로 심장을 헐떡이며 금방이라도 발톱을 들고 달려들 듯한 야수의 숨소리가 들린다.

“당신에게 그 사람이 도대체 뭘 잘못했소.”

“오늘 처음 봤어.”

<히트> <인사이더> <알리>에서 펼친 마이클 만의 세계는 완벽주의 남성이 낭만적으로 패배하는 세계다. 지더라도 무릎 꿇지 않으며, 일에 관한 한 실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들 사이의 긴장은 이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첫 살인사건 뒤 택시운전사는 살인의 이유를 따지고(이렇게 대담할 수가), 살인자는 60억 인구 중 하나가 죽었을 뿐이며 르완다 종족 학살과 나가사키 원폭 피해로 죽은 사람의 운명과 다를 게 무어냐며 태연하게 대꾸한다.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비추는 카메라는 이야기에 팽팽한 장력을 더해준다. 마이클 만의 영화가 보여주는 진경은 한발도 비켜설 생각이 없는 두 남성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화해의 암시를 잡아낼 때다.

성큼 40줄에 들어서 돌연 연쇄살인마로 나타난 톰 크루즈의 강렬한 인상은 1999년 <매그놀리아>에서 서슴없이 “Respect the Cock”이라며 남자들에게 여자낚는 법을 가르치는 섹스강사 프랭크 매키를 연상시킨다. <매그놀리아>에서처럼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에 겨워 더 센 척하지만 <콜래트럴>엔 아예 과거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솜씨, 한 호흡도 흔들리지 않고 후회하는 법도 없이 마무리하는 자세는 살인청부업을 기예의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여기에 살인을 합리화하는 달변의 철학, 살인 뒤의 여유를 느끼기 위해 찾는 재즈바가 우리를 경악시킨다.

아마 맥스는 <히트> 이후 등장한 마이클 만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편한 인상을 주는 사내일 것이다. 고된 노동이 그를 힘들게 할 때마다 선바이저(햇볕을 가리는 차양)에 끼워넣은 몰디브 사진을 보거나 벤츠 카탈로그를 뒤적이고, 엄마에겐 태연히 리무진 회사 사장이라고 속이는 이 사내에게 뭐 대단한 게 있을 수 있을까. 빈센트는 난처한 수수께끼로 목을 조여오는 악마다. 그가 맥스에게 던지는 제안은 살인을 돕거나 아니면 죽거나다. 맥스는 어떻게 곤경을 벗어날 수 있을까. 또 빈센트는 어떻게 맥스를 협박해 자신의 임무를 완성할 것인가. 관객은 빈센트의 손아귀에 잡혀 끌려다닌다.

<콜래트럴>은 마이클 만의 대중적인 감각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600명의 한국인 엑스트라를 하루 12시간 동안 붙들고 찍은 나이트클럽 총격전의 생동감, 긴장과 이완이 꼼꼼하게 계산된 드라마에서 숙련된 장인의 기량이 배어나온다. 선명하게 잡은 도심의 야경은 서늘하기 그지없다. <히트>와 <인사이더>가 유장하게 풀어낸 대형 벽화라면 <콜래트럴>은 꽉 짜인 소품이다. 모자란 듯한 품을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이 매끄럽게 메운다. 기운 자국 하나없는 장인의 솜씨임은 분명하지만 목구멍을 뜨겁게 하는 묵직한 존재감은 없다.

:: 조연배우들

<알리>의 배우들, 한 몫 했네

제이미 폭스

제이다 핀켓 스미스

<알리>의 배우들이 <콜래트럴>에선 큰 몫을 한다.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레이>(미개봉)에서 레이 찰즈 역을 맡기도 한 맥스 역의 제이미 폭스는 <알리>에선 쥐가 가운데 머리를 파먹은 듯한 독특한 헤어 스타일의 코너맨(링 사이드에 오르는 권투 코치진) 드루 분디니로 나왔다. 윌 스미스나 존 보이트에 가리긴 했지만 허풍과 술주정조차도 밉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택시운전사 역으로 러셀 크로나 애덤 샌들러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제이미 폭스가 결국 맥스를 맡았다.

<알리>에서 알리의 섹시한 첫 연인으로 나왔다가 일찌감치 사라진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이후 <매트릭스> 2, 3편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콜래트럴>에선 처음과 마지막의 결정적 장면을 떠맡았지만 마이클 만의 영화가 그러하듯, 여성 영웅을 위한 장소는 넓지 않다. 이번 영화에서 비중은 상대적으로 작지만, <알리>에서 변덕스럽고 아쉬울 때만 알리를 찾는 후원자 허버트 역을 맡았던 배리 샤바카 헨리의 얼굴은 잊기 어려울 것이다. 재즈클럽의 사장이자 트럼펫 주자인 다니엘 역이다. 그가 빈센트와 1960년대 재즈의 전성시대를 떠올릴 때 이 비정한 도시에도 황금시대가 있었음을 믿게 된다.

잔소리와 애정을 절묘한 비율로 섞어 표현하는 맥스의 엄마 이다는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는 아들 맥스 못지않다. 바로 <레이디 킬러>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이르마 홀이다. 머리를 뒤로 묶은 스마트한 형사 패닝 역의 마크 러팔로, 위엄과 농담을 함께 구사하는 갱 두목 펠릭스 역의 하비에르 바르뎀 등 조연진이 영화의 긴장감을 한층 더 조여준다. 톰 크루즈와 그저 어깨 한번 부딪치고 사라지는 <스내치>와 <이탈리안 잡>의 인상적인 대머리 존 스태트햄이 카메오일 정도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아쉽게도 알 파치노(<알리> <인사이더>), 존 보이트(<알리> <히트>) 등 깊은 주름살 사이로 지혜와 연륜을 보여주는 배우가 <콜래트럴>엔 없다. 아무래도 마이클 만의 영화는 늙어갈수록 더 깊고 멋있어지는 배우들을 만나야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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