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그 남자의 근황.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포르노 소설을 쓰는 차우(양조위)는 밤마다 여자를 갈아치우는 바람둥이가 되어 있다. 만취해 쓰러진 여자(유가령)를 데려간 곳은 오리엔탈 호텔 2046호. 사랑했던 여인 수리첸(장만옥)과 남몰래 만나고, 함께 무협소설을 써내려가기도 했던 그 방도 2046호였다. 2046호를 맴돌며 <2046>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에겐 세명의 여자, 세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2046호에 머무는 매력적인 여인 바이링(장쯔이)과는 종종 뜨거운 밤을 보내는 사이로, 그녀는 그의 ‘마음’을 원하지만, 그는 “그것만은 빌려줄 수 없다”고 버틴다. 집안의 반대 속에서도 일본 애인과의 사랑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호텔 사장의 딸 왕징웬(왕페이)과는 연애와 소설에 대해 많은 공감을 나누지만, 이들 사이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싱가포르에서는 프로 도박사(공리)와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본명이 수리첸(과거의 그 여자와 동명이인)인 그녀는 어둡고 무거운 과거의 그늘에 묻혀지낼 뿐이다. 자의든 타의든 둘 다이든, 차우는 ‘다시’ 사랑하지 못한다. 그는 거부하는 여자에게 “과거에서 벗어나면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하지만, 그건 그 자신을 향한 애원이자 탄식이다.
차우의 과거는 그의 소설, SF판타지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는 미래에 대해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쓰고 있다. 2046은 소설 속에서 모든 것이 불변인 채 영원한 곳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려는 사람들이 찾아든다. ‘나’(기무라 다쿠야)는 2046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 안드로이드 승무원(왕페이)을 사랑하게 되고, “떠나자”고 청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 판타지에선 현실의 왕징웬과 그의 일본 애인이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차우는 남자 주인공을 ‘나’라고 칭하고, 그에게 자신의 과거와 현재, 욕망을 투사한다. 그는 기억과 과거를 상징하는 2046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진정으로 그걸 원하는지, 그게 가능한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또한 왕징웬에게서 새로운 사랑을 예감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연인이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제, 사랑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2046>은 <화양연화>의 인물과 전사를 빌려온 일종의 후일담이다. <화양연화>에서 차우의 교활한 면을 부각시켜, 그가 2046을 일종의 덫으로 삼는다는 설정을 촬영까지 하고 쓰지 않았던 왕가위는 <2046>에서 조금은 교활하고 냉소적이고 색을 밝히는 옛 버전의 차우를 소환해냈다. 물론 차우의 그런 위악적인 변화는 그가 과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는 “친구랑 무협소설 공동 창작을 해봤는데, 잘 안 됐다. 생각해보면 그때가 좋았다”거나 “내게도 해피엔딩이 있을 뻔했다. 오래전 그때”라는 대사로 <화양연화>의 그녀를 추억한다. 역시 <화양연화> 때 촬영하고 쓰지 않은 70년대 일화 속의 인물 싱가포르 여가수 루루(유가령), 차우의 회사 동료이자 그의 연애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핑도 ‘그 시절’을 환기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2046>은 신기할 만큼 <화양연화>를 닮지 않았다. 문화혁명의 자장안에 있던 1966년의 홍콩부터 먼 미래로 상정된 미지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시간의 경과를 강박적으로 보고하고, 쉼없이 상황을 설명하고 반복하는 이 영화는 느림과 절제의 미학을 선보였던 <화양연화>와는 정반대로 달려간다. <화양연화>가 은밀하고 함축적인 ‘시’였다면, <2046>은 과시적이고 비장한 ‘오페라’다. SF소설이 끼어든 까닭이겠지만, 훨씬 문학적이고, 연극적이고, 장식적이다. 왕가위의 오랜 파트너인 미술감독 장숙평은 문화혁명기 홍콩의 불안과 열정, 허무와 쾌락의 공기를 포착한 것은 물론, 서구 평자들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바바렐라>에 비견하는 SF적 미장센으로, 아찔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양조위, 장쯔이, 공리, 기무라 다쿠야 등 중화권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스타들이 포진한 캐스팅은 그 자체로 황홀한 스펙터클이다. 홍콩의 중국 반환 50년째가 되는 2046년이라는 ‘시점’, 그 ‘유통기한’까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가늠하고 있다는 점에서 <2046>은 홍콩 반환이라는 예정된 소멸의 시간으로 치달았던 왕가위의 90년대 영화들과 더 많이 닮아 있다. <2046>은 <화양연화>의 후일담이면서, 왕가위 전작들의 집대성처럼 느껴진다.
왕가위는 <화양연화>라는 제목이 여인은 사랑할 때 가장 아름답고, 그것은 곧 홍콩이 가장 아름답던 시절을 뜻한다고 했었다. <2046>에서는 그 여인과 그 시절을 다시 추억하면서,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남자의 초상을 공들여 보여준다. 그건 과거에 집착해서도, 과거를 부정하거나 망각해서도 안 된다는, 왕가위 스스로의 다짐 같아 보인다. 그의 오랜 테마, 사랑과 시간에 대한 성찰, 홍콩에 대한 애정어린 향수는 <2046>에 이르러, 가장 화려한 꽃으로 만개했다.
:: <2046>의 네버엔딩 프로덕션 스토리
5년동안 조금씩 바꿨을 뿐인데…
“대체 이 영화는 2046년에나 완성되는 건가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촬영에 지친 기무라 다쿠야가 이렇게 불평했다는 유명한 일화. 영화제라는 데드라인도 별 강제성이 없는 것인지, 왕가위는 기정사실화됐던 2003년 칸 출품을 보란 듯이 2004년으로 미루고도, 예정된 시사를 하루 더 연기했다. 영화제에 선보였다고 끝난 건 아니었다.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것이 마지막 버전”이라고 다짐하면서도, “3주만 더 주면 완전히 다른 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다”던 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늦여름 무렵에도, 왕가위가 <2046>을 찍고 있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사실이었다.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다시 선보이는 <2046>은 칸에서 선보인 버전보다 10여분 정도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에 띄게 달라진 부분은 칸 버전에서 내레이션만으로 소개됐던 왕징웬과 그의 일본인 연인과의 사랑이 추가됐다는 것. 칸 버전에 2046 열차를 타는 탁 역으로 짧게 등장하고 말았던 기무라 다쿠야가 현실의 연인으로도 출연하고 있는데, 기무라 다쿠야를 중심으로 추가 촬영했다는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이야기의 축도 양조위-장쯔이 단독에서, 왕페이-기무라 다쿠야 더블로 늘어났고, 여전히 특별 출연이긴 하지만 기억 속의 장만옥 장면도 약간 늘었다(장만옥과 기무라 다쿠야는 칸영화제 시사 직후 촬영분에 비해 턱없이 미미하게 줄어든 출연분에 화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046>은 <화양연화>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2046>이 <화양연화>와 거의 동시에 제작 진행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제작 기간은 5년이 넘은 셈이다. 그 사이 많은 것이 달라졌다. “<화양연화>의 후속편이나 마찬가지지만, 꼭 후속편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4년 동안 작업하면서 애초에 생각했던 캐릭터들은 완전히 다른 성격으로 변모했다.” 이를테면 2001년 <2046>에 대한 뉴스에는, 클래식 오페라를 재해석하는 3부작의 구성이며, 양조위는 우편배달부로, 유가령은 ‘나비부인’으로 설정돼 있고, 심혜진이 왕정문과 더불어, 기무라 다쿠야의 애인으로 출연한다고 돼 있다. 심혜진이 하차하고, 장쯔이가 투입되는 등 캐스트의 변화는 물론, 스토리도 애초의 것과 많이 달라진 것이다. <화양연화>의 칸 출품 등 여러 변수로 촬영을 중단하기도 했다. 오래 작업하고, 많이 바꾸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왕가위지만, <2046>는 가장 심했던 경우다. 이에 대해 왕가위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그는 촬영 기간 중 거의 일상적으로 촬영을 중단한 채 어디론가 숨어들어가 촬영한 부분에 대해서 재검토하며 그 함의를 심사숙고하거나, 혹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의 방향을 떠올려내곤 한다”고 해명한다. 그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미술감독이자 편집가인 장숙평, 배우 양조위 등 스릴과 고통과 희열이 교차하는 왕가위와의 작업에 중독된 “충성심 증후군의 희생자”들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