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플래닛>은 르네 랄루의 첫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단편 시절의 테마(거대 괴물의 공격을 다룬 <달팽이들>)와 형식미(펜 드로잉이 두드러진 <데드 타임즈>)를 결합한 것이다. CG 기술이 하이퍼리얼리즘까지 허락한 이즈음, <판타스틱 플래닛>과의 만남은 낯선 충격으로 다가온다.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는 중세풍의 삽화집처럼 보이는 <판타스틱 플래닛>은 3년 반 동안 종이에 일일이 손으로 그려넣어 완성한 페이퍼애니메이션으로, 모던한 CG애니메이션이나 전통적인 셀애니메이션과 달리 회화적인 터치가 생생하다. 브라운과 블루 컬러의 붓 터치, 세밀한 펜선이 두드러지는 그림체는 SF판타지의 초현실적인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있다. 트라그들이 명상을 통해 유체 이탈하는 모습이나 크리스털이 꽃처럼 피어나다가 휘파람에 깨지는 장면은 신비롭고 몽환적이며, 신체 부착 무기처럼 쓰는 전투 괴물, 그리핀과 개미핥기가 합체된 괴물 등의 단역 캐릭터들에도 범상치 않은 시각적 상상력이 엿보인다. 이 작품을 “사이키델릭하다”고 정의한 한 평자는 “르네 랄루와 롤랑 토포르는 작업 당시 환각상태였을 것이다”라는 가설로 에둘러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완성하기까지 꼬박 3년 반이 걸렸다는 <판타스틱 플래닛>은 1973년 세상에 나와,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다. 놀라운 것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SF적 상상력이 진부하거나 유치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의 명성에는 다 이유가 있다.
초현실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SF판타지의 고전, <판타스틱 플래닛>
글
박은영
2004-04-07
르네 랄루의 SF적 상상력, 그 최대치를 맛볼 수 있는 작품
아기를 안고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여인. 거대한 푸른 손가락의 추격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 홀로 살아남은 아기는 푸른 거인의 애완동물로 입양된다. 거인들의 선진 문명 속에서 자라난 그는 주인의 학습 헤드폰을 동족들의 품에 안기면서, 다 함께 힘을 합쳐 거인들에게 대항하자고 설득한다. 다른 별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인 종족은 ‘옴’(homme: 사람, 남자)으로 불리고, 스스로 ‘만물의 영장’임을 자부하는 거인 종족 트라그는 다른 생명체를 탄압한다. 지식도 권력도 나눌 수 없는 트라그가 옴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시적이고 철학적인 ‘심오한’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플래닛>은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기계 문명과 매스 미디어, 서로 다른 문화권의 충돌, 냉전시대의 공포까지. 체코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애니메이터 르네 랄루의 배경으로 보면, 소련의 체코 침공에 대한 비유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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