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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은 스토리의 나태한 진행,<낭만자객>
김현정 2003-12-02
한을 풀기 위해 자객을 고용한 귀신들, 그런데 잘한 일일까?

<낭만자객>은 <두사부일체> <색즉시공>을 만든 윤제균 감독의 세 번째 영화다. 그는 스타나 대규모 자본 없이도 경이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어왔고, 기획에 승부를 거는 그의 전술은 제작비 35억원을 확보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어리숙한 자객 일당과 한을 풀기 위해 그들과 연을 맺는 원혼들. <낭만자객>은 무협과 코미디를 포함할 수 있는 이런 설정을 바탕으로, 가능한 모든 웃음의 코드를 재봉질하듯 박아넣기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낭만자객’은 예랑(최성국)이 이끄는 자객집단을 칭한다. 예랑은 구박덩어리 요이(김민종)를 데리고 어느 흉가에 들렀다가 귀신 신이(신이)가 모아놓은 눈물 999 방울을 마셔버린다. 그 눈물이 없으면 신이와 그 친구들은 승천할 수 없다. 대안은 그들을 죽인 자를 찾아 원한을 갚는 것. 귀신 향이(진재영)는 예랑에게 조선에 머물고 있는 청나라 최고의 자객 사룡을 살해하라고 주문하지만, 자기 몸 하나 건사할 줄 모르는 이 사내들은 비참하게 두들겨맞고 돌아온다. 참다 못한 향이와 신이, 다른 친구들은 자객들에게 영혼검법을 전수하기로 결심한다.

윤제균 감독은 <낭만자객>을 전작들보다 더 빨리 마음속에 떠올렸다고 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영화는 <천녀유혼>이었지만, 두편의 코미디로 성공을 거둔 지금, <낭만자객>은 그 두편의 장점을 끌어와 뒤섞은 영화가 되었다. 뭘 하든 백발백중 실패만 하는 청년들과 그들보다는 능력도 있고 아름다운 처녀들의 만남은 <색즉시공>과 비슷하다. 영혼검법을 전수받던 자객들이 귀신들의 농염한 춤에 넋을 잃더니 제각기 짝을 짓고 밤을 보내는 식이다.

신이는 지난번과 똑같이 사투리로 걸쭉한 욕설을 뿜어대고, 최성국도 위엄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마찬가지로 허무하게 무너진다. 같은 뼈대와 같은 캐릭터, 같은 관계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색즉시공>과 다르다. <색즉시공>은 한국영화가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했던 스무살 무렵 성애를 향한 갈망과 소박한 애정을 담은 영화였다. 신선하고 진솔했지만, <낭만자객>은 그 허물에 불과하다. 매사가 신기하고 즐거운 대학생들은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을 추고 파트너를 사냥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복수를 염원하던 귀신들이 왜 느닷없이 옷을 벗어던져야 한단 말인가. <낭만자객>은 너무 자주 옷을 벗고 화장실을 뒤지는 영화고, 거기에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다.

<낭만자객>의 웃음이 <색즉시공>이라면 눈물은 <두사부일체>다. <두사부일체>는 조폭 두목이 고등학교에 편입한 코미디가 절반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가 사학재단의 비리에 맞서는 눈물의 드라마였다. 이번에는 효순과 미선의 죽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조선의 기생들이 청나라 자객에게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어린 조선 소녀가 청나라 관료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이다. 아이의 작은 몸이 화살에 꿰뚫리고, 공중으로 떠올라 나무에 못박히는 장면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관청에 몰려가 항의하는 군중, 홀로 떠도는 아이의 투명한 영혼, 아끼느라 들고만 다녔던 꽃신을 아이에게 신겨주는 오빠의 손길이 이어진다. 영화 한편을 다 보고나니, 다른 영화 하나를 더 보여주는 것 같다.

단점이 많았지만, 윤제균은 관객과 친한 감독이었다. <두사부일체>의 말장난이나 <색즉시공>의 화장실 유머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선 웃음을 주었다. 그러나 <낭만자객>은 나태하다. 신이가 ‘ㅡ’와 ‘ㅆ’ 발음을 못해 놀림받는 장면은 닳고 닳아 구멍이 날 정도로 오래된 유머다. 예랑이 펼치는 고수검범, 장난을 쳐서 고수의 정신을 흐리게 한 다음 칼을 들이대는 검법도 너무 낡았는데, 틈만 나면 자꾸 나온다. 게다가 이 영화는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요이가 사모하는 듯한 페이페이는 청나라 여인이다. 그녀가 왜 조선에서 가족과 살고 있는지는 보도자료를 봐야만 알 수 있다. 동료들과 함께 납치 임무를 완수한 요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혼자 떨어져 페이페이의 집에서 놀다가, 숲속에서 길을 잃고 처음 보는 흉가에 들어간 동료들을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찾아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낭만자객>은 누구나 보고 싶어할 만한 스토리를 찾아낸 영화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한 윤제균의 유머도 여전히 허를 찌르는 재미를 준다. 거침없이 욕설과 비속어를 주고받으면서 신세를 한탄하는 귀신들이나 무도장에서 댄서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자객들은 장르나 시대구분에 조금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두사부일체> <색즉시공>이 그처럼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낭만자객>은 좀더 자유로운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배우들역전의 용사들과 새로운 지원군들

윤제균 감독은 <색즉시공>을 찍으면서 다른 감독들이 돌아보지 않던 배우들로부터 절묘한 코미디 연기를 뽑아냈다. 그 배우들 최성국과 진재영, 신이는 이번에도 만날 수 있다. 차력시범을 보여주던 선배 최성국은 준수하고 위엄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자객단 두목 예랑으로 출연한다. 요이와 거의 같은 비중을 가질 만큼 중요한 캐릭터로 성장한 경우. 최성국은 “감독의 연출도 자신있고, 선후배 배우들의 연기도 자신있는데, 제가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겸손하게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신이는 <색즉시공>에서처럼 거친 욕설을 달고 사는 경상도 출신 귀신 신이를 연기했다. <노랑머리2>에 출연하기도 했던 신이는 얼마 전 <위대한 유산>에서도 무표정하고 터프한 연기로 코미디의 재능을 증명한 배우. 몇년 동안 잊혀졌다가 <색즉시공>으로 재기한 진재영은 지난번과 달리 신이에 버금가는 욕설과 폭력으로 무장했다. 아름다운 귀신 향이로 출연한 그녀는 경상도 억양으로 “이런 고릴라 씨받이같은 *”이라고 욕을 퍼부으면서 몸싸움도 불사한다. 이들 외에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MC로 활동했던 이매리다. 박수무당과 바람이 난 그녀는 남편의 사주로 낭만자객에게 납치당하지만, 며칠 동안 이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인물.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나와 콩까려는 게냐”는 <낭만자객> 최고의 대사로 꼽힐 만하다. 이외에도 리포터 조정린이 예랑의 정혼자였지만 무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정린 공주로 출연하고, <똑바로 살아라>의 김흥수가 낭만자객의 일원으로 출연한다. 페이페이를 연기한, 공리를 닮은 듯한 배우는 <아리랑>의 황신정. 뜬금없이 중간중간 출연할 뿐이지만, 현지인과 비슷한 억양에 단아한 외모는 눈여겨보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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