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고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서 혼자 사는 바텐더 제이(마크 라일런스)는 수요일마다 찾아온다는 것 외에는 신상에 대해 전혀 모르는 여자(케리 폭스)와 매주 섹스를 나눈다. 만남이 계속되던 어느 날 관계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녀를 미행하기 시작한 제이는 그녀가 연극배우라는 사실과 공연하는 극장이 어디인지를 알아내고 그녀의 남편과도 가까워진다. 그리고 제이는 수요일의 여자가 자신의 아내임을 알 리 없는 그녀의 남편에게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 Review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를 말할 때, 이미 해외에서도 무수한 논란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 섹스장면들을 빼놓을 수는 없는 것 같다. ‘포르노그라피를 연상시키는 사실적 섹스장면’이라거나 총 119분 러닝타임 중 35분이 할애되었다거나 미국에서도 이제 보기 드물어진 NC-17등급을 받게 했다는 그것들 말이다. 물론 소문은 어쨌거나 모두 사실이다. 영화가 51회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작품상)을 받았을 때도 세인의 관심은 주로 그 ‘35분’에 집중되었고 감독인 파트리스 셰로도 인터뷰에서 그 35분에 관한 내용은 더이상 답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역시 유감스럽게도 2년이 지나서야 늦게 개봉하는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가 관심을 끈다면 아마도 그 차원일 것이다. 원제인 <친밀>(Intimacy)이 <정사>라는 제목으로 둔갑하고 홍보도 (불가피한 일이지만) 가급적 그쪽에 쏠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선 정말 어떠냐 하면 뜨거운 소문과 기대만큼 그 35분이 부응하는 것 같지는 않다. 분명 그 장면들이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사실적’이라는 점에서는 의심할 바 없지만 ‘충격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국내 개봉시, 뿌옇게 성기 부분을 가리고 상영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판타지가 발라내진 중년 남녀의 육체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영화가 할애된 시간이나 묘사의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성’(性)을 중심에 두고 있지 않은 탓이다.
낯선 이들이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고 ‘묻지마 섹스’를 거듭하고 서로에 대해서 알려는 순간 긴장과 파국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잠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떠오르는 이 영화의 노림수는 파격적인 성 묘사를 통해 전복적인 에너지를 폭발시키려는 데 있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역시 비슷한 소재인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의 드라마적 관심사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영화는 섹스를 중심으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려는 데에도 사실은 관심이 없는 편이다.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조차 그 제목에 ‘포르노그라피’를 올린 것과 비한다면 이 영화가 택한 제목 <Intimacy>는 그런 점에서 퍽 시사적이다.
<정사>는 관계나 소통을 넘어 차라리 존재론적인 질문을 담은 드라마다. ‘수요일의 여자’ 클레어의 수요일이 그저 불륜이나 ‘성적 일탈’의 이슈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버거운 영국 워킹클래스의 척박한 삶의 와중에도 모진 어려움을 감내하며 그녀가 감당하는 연극배우로서의 삶은 사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인간됨’을 지키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아마추어 연기자들을 지도하는 시간에 있는 ‘극중극’(劇中劇)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통해 그녀에게 수요일의 섹스가 그런 연극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인간됨’을 옥죄는 종류(남편)로서가 아닌 ‘친밀함’에 기반한 관계를 수요일 동안이라도 바라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결코 오디션에 합격하지 못하는 그녀의 연극배우로서의 커리어가 상징하듯이 영화는 이미 ‘수요일의 남자’인 제이와 그녀가 수요일만큼이라도 꾸려가려는 관계의 불가능성을 상정한다. ‘풍선의 배꼽’처럼 각자 실존이나 관계를 향해 몸부림칠수록 오히려 모든 것이 서서히 와해되고 또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몇 번의 섹스는 그렇게 허물어지는 관계가 변화할 때마다 마치 소설의 매 챕터 제목처럼 삽입된다. 이처럼 영화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친밀감이나 관계를 명상할 때, 영화는 흡사 섹스장면으로 시작되는 몇편의 단편소설들을 한데 묶어놓은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영화는 설명은 자제하고 내러티브의 숨을 죽인 채로 일단 등장인물들 내면의 풍경을 응시한다. 꿈도 잃고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버림받은 이혼남 제이에게는 가구 하나 변변히 없는 휑뎅그렁한 아파트가, 클레어에게는 화장실 입구와 같은 문을 쓰는 협소한 소극장이 되는 것이다. 또, 친밀감이 배제된 소외된 내면의 공간엔 푸른 편광 조명을 보태고, 클레어의 남편과 제이가 만나는 공간은 압박감이 느껴지는 협소한 화각의 프레임으로 만드는 식의 수법 위에 흡사 사진처럼 느껴지는 텅 빈 숏들을 사이사이 배치하면서 파트리스 셰로 감독은 자신이 의도했던 테마 모두를 함축할 수 있는 문학적 비약을 영화적으로 모사해낸다. 이렇게 고조되는 드라마는 따라잡기가 쉽지 않지만 어떤 인물에 대해서든 공감하게 만든다. 영화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면 아마 그 지점에서일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의 각본을 썼던 하니프 쿠레이시의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 배우들
' 세기의 목소리 ' 마리안 페이스풀을 기억하세요?
굳이 35분의 정사장면을 들지 않더라도 영화 <정사>는 주연인 두 남녀 배우의 연기력에 상당히 기댄 작품이다. 특히 <여왕 마고>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프랑스 감독 파트리스 셰로의 첫 번째 영어 작품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그 점은 더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감독은 케리 폭스의 연기 이해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영화 <천사와 벌레>에서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곤충연구에 몰두하는 귀족 출신 과학자 역을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와 함께 연기한 것 외에는 <정사> 이전에 이렇다 할 영화경력이 없는 마크 라일런스는 주로 TV와 연극에서 경력을 쌓은 영국 배우.
반면, 뉴질랜드 출신인 케리 폭스는 당시 스물네살 때, 역시 뉴질랜드 출신 감독인 제인 캠피온의 영화 <내 책상 위의 천사>에서 주인공인 자넷 프레임 역을 맡아 화려한 스크린 신고를 했고 다시 4년 뒤엔 대니 보일 감독의 짓궂은 영화 <셸로우 그레이브>에서 이완 맥그리거와 함께 주연으로 공연했다. 그러나 그 이후엔 여러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는데 <정사>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외에도, 클레어의 남편 앤디 역을 맡아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인상적인 연기를 했던 티모시 스팔은 영국 4급 훈작사를 갖고 있는 영국의 중견 배우. 많은 영화와 TV쇼에서 얼굴을 알렸지만 특히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에서 주·주연으로 호연을 펼쳤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신작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도 만나게 될 예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클레어의 연기 수강생으로서 마음의 고통을 겪는 클레어에게 굴곡 많았을 법한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금언을 들려주는 베티 역의 마리안 페이스풀을 빼놓을 수 없다. <This Little Bird>를 부른 가수, ‘세기의 목소리’로 불렸던 그녀, 믹 재거의 연인, 그 마리안 페이스풀이 맞다. 격동의 60∼70년대를 가장 그 시대답게 살아냈던 문화 아이콘 중 하나였으며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였던 그녀의 늙고 뚱뚱한 모습을 영화 속에서 보게 되는 경험은 영화 전체 분위기나 그녀가 연기한 베티의 캐릭터와 어울려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