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일제시대. 경성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정신이상자가 되어 귀향한 영진(노익현)은 일본 순사나 그 앞잡이들만을 골라서 골탕먹이는 기행으로 소작농 아버지의 근심을 산다. 누이 영희(황신정)는 대학생 현구(이필모)와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악덕 지주의 아들 기호(최대원)가 치근대는 바람에 괴로워한다. 기호가 영희를 겁탈하려 하자 영진이 낫을 들어 살인을 저지른 뒤 정신이 돌아온다.
■ Review나운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아리랑>을 리메이크한다…. 국가적인 기념 사업이라면 도리어 때늦었다 하겠지만 민간인 제작자(이철민)가 상업영화의 지형 안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다소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관객 입장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영화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 <아리랑>이 지난 80여년 동안 항일 혹은 민족주의를 호소하려는 모든 드라마와 영화에 원형적인 내러티브를 제공해왔기 때문에 이야기성의 측면에서는 리메이크 <아리랑>이 관심을 끌기 어렵다. 그래서 이두용 감독이 택한 전략은 형식의 복원이다. 흑백이자 변사의 해설을 수반한 무성영화라는 기원적인 영화형식이 하이퍼 테크놀로지 시대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낯선(!) 형식이란 적절하게 사용되기만 한다면 새로운 재미의 원천이다. 초기 영화들은 오늘날과 같은 1초당 24프레임이 아니라 18프레임으로 찍혔다. 사람의 움직임이 부드럽게 연결되어 보이지 않고 툭툭 끊어지듯 다소 빠른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기술적인 한계로 인한 결함이었겠지만 오늘날에는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에서 보듯이 무성영화의 독특한 느낌과 매혹을 상징하는 하나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리메이크 <아리랑>은 초당 24프레임과 18프레임 두개의 버전으로 촬영되었지만 개봉되는 것은 18프레임짜리다. 이것은 이두용 감독이 내린 가장 중요한 결정인 것으로 보인다. 원작 <아리랑>은 “극장 안이 눈물바다가 되었고 모두가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는 구전과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비극이다. 그러나 리메이크 <아리랑>이 이런 식의 비극성을 계승하려 한다면 시대착오적이 될 우려가 크다.
반면 18프레임 영화는 오늘날의 관객에게 코미디의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로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접하고 기억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18프레임 영화의 특성상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과 동작을 살리기 어렵기 때문에 내면 연기나 오밀조밀한 서사 대신 외적인 상황 중심으로 액션이 큰 연기를 하게 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기에 과장된 연기를 하게 된다는 뜻이고, 곧 줄거리를 탁탁 토막 쳐 넘기면서 배우 액션이 거의 안무 수준으로 크고 코미디의 느낌을 적절하게 끌어들이는 시트콤 효과와 연결된다.
이두용 감독이 택한 전략은 형식의 복원이다. 흑백이자 변사의 해설을 수반한 무성영화라는 기원적인 영화형식이 하이퍼 테크놀로지 시대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기법은 필연적으로 타이트한 숏 대신 풀숏과 롱숏을 주로 사용하게 만든다. 이는 세트 촬영이 아닌 한옥 마을을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영화적 특성과 잘 어울리고, 사극의 베테랑인 감독의 연출력을 한껏 과시하는 효과를 수반하기도 한다. 원숙한 중견감독이 만들어내는 화면에는 신인감독들의 영화에서 얻기 어려운 어떤 쾌감이 있다. <아리랑>의 경우에도 카메라의 위치와 이동이 낳는 미장센이 유려하고 편집 리듬도 쾌적하다. 짤막짤막한 플래시백숏을 현재의 화면과 막바로 대응시키면서 이야기의 효율성을 높여가는 대목도 눈여겨보게 된다.
무성영화는 한번도 무성인 적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아리랑> 역시 엄청난 소리로 넘쳐나는 무성영화다. 과거의 무성영화가 자막과 변사의 해설을 교대로 사용하고 음악 반주를 곁들인 것과 유사하게, 여기서도 자막 대신 배우들의 목소리 일부를 후시녹음으로 집어넣었고 변사(최주봉)의 해설과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용했다. 변사와 음악은 배우들의 연기 톤을 정서적으로 보완할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의 내러티브 해석을 지배한다.
<아리랑>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컬러 유성영화에 24프레임으로 전환한 마지막 시퀀스다. 앞부분이 답답하다고 느낀 사람에게는 “눈이 시원해지는” 변화겠지만, 앞부분이 흥미로운 영화적 성취라고 본 사람에게는 기가 탁 막히는 ‘악수’다. 고군분투했을 제작현장의 어려움이 컬러 화면을 통해 조악하게 드러날 뿐, 흑백 18프레임을 통해 관객의 정서를 좌지우지하던 앞부분에 비해 효과가 떨어진다. 오래된 양식이라고 해서 낡은 것이 아니고, 최근 것이라고 해서 현대적인 것이 아니다. 혹시 제작진 내부의 이견을 절충한 끝에 나온 산물이라면 재고를 요청하고 싶을 만큼 안타까운 일이다.
나운규의 <아리랑>과 변사영화가 불가능하다면 푸른 바다에 빠져 죽으리라!
리메이크 <아리랑>의 원작이 된 1926년작 <아리랑>(감독 나운규)은 초기 한국영화가 미학적, 산업적으로 성립되는 데에 일대 분수령이 된 작품이다. 어느 나라나 초기 영화사는 영화라는 완전히 낯선 매체를 양식적으로 개발하고 영화제작의 원형적인 이념이나 이야기성을 찾아나가는 데에 바쳐진다. 한국의 경우 식민지 상황에서 영화를 수용했기 때문에 이같은 과제는 선진 각국에서 수입되는 영화들을 흉내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이처럼 지난한 문제를 해결한 전범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리랑> 같은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 당대의 화두였다), 항일 민족주의라는 절체절명의 사회적 과제를 돌파해낸 뛰어난 문화적 생산물이기도 했다. 철권 통치를 자랑하던 일제 당국이 이 영화의 확산을 저지할 수 없었던 괴력의 정체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운규는 십대 때 고향 회령을 떠나 청진에 머물면서 “엑조틱한 기분을 느낀다”고 일기에 적은 자유인이자,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부산키네마에 입사 시험을 치르면서 “영화 하나 때문에 가정의 정을 버리고 학업을 중지하고 이렇게 불타는 정열을 바치는데 입사가 불가능하다면 푸른 바다에 빠져 죽으리라”고 썼던 시네필이었다. 1937년에 만 35살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27편의 작품에 간여했던 나운규의 필모그래피는 문헌밖에 남아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춘사’라는 신화 속에 가둬두기에 갑갑한, 풍부하고 다양한 표정을 띠고 있다.
리메이크 <아리랑>의 흥미 요소 가운데 하나는 변사다. 변사는 한국에서 특히 오래 살아 남아 해방 이후까지 활동했는데, 이미지로 하여금 말과 내러티브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며 영화의 해석을 감독의 의도로부터 떼어내어 순간적이고 다양한(localized) 해석에 일정 부분 내어 맡기는 기능을 했다. 이 영화의 경우 변사의 목소리가 이미 더빙되어 있기 때문에 변사의 해설이 곧 감독의 해석이라는 변용을 낳았다. 변사의 기능은 현대 영화감독들에게도 숙고해볼 만한 사안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