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8일 존 레넌은 죽었다. 같은 시간 한국에서 태어난 한 청년은 자신이 존 레넌의 환생이라고 믿으며 그 비밀을 숨긴 채 살아간다. 홀어머니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청년은 이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긴머리 가발을 쓰고, 안경을 걸치고, 기타를 둘러멘 그는 이제 존 레넌이다. 길거리를 방황하던 ‘존 레넌’은 어느 날 한 지하철역에서 오노 요코를 닮은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요코’와의 사랑이 바닥에 내팽개쳐지던 날, 그의 환상도 산산조각나버린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가 2003년에 발견된 ‘보석’이라고 한다면, 그가 9년 전 만든 단편 은 ‘원석’ 같은 영화다. 이미 옆 상영관에서 ‘될성부른 나무’를 보고 나온 관객이라면 이 ‘떡잎’을 확인하는 소급절차는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같은 날 개봉하게 될 두 영화는 여러모로 닮은 구석이 많다. 주인공들은 모두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지구…>의 병구는 지구침략을 준비하는 외계인의 정체를 홀로 연구해왔고, 의 청년은 자신이 죽은 존 레넌의 현신임을 숨기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과대망상이나 정신분열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 진실여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잿빛의 암울한 어린 시절 속엔 동시에 자살한 아버지의 기억이 포탄처럼 박혀 있고, 사랑은 살해되거나 짓밟혔다. 마침내 삶을 지탱한 이유였던 어머니마저 외계인 혹은 진짜 존재를 몰라주는 세상 때문에 희생당하고 만다. 이들의 폭로와 분노는 그렇게 시작된다.
기발하면서도 황당한 상상력으로 막을 여는 은 사실 외로움과 고립에 대한 깊고도 진지한 소고다. 세상을 깜작 놀라게 만들 위대한 천재 뮤지션의 부활도, 지구를 구할 절대적인 방어책도 싸늘한 냉대 속에 소멸되고 만 세상. 서글픈 ‘2001년의 상상’은 존 레넌의 <이매진>을 송가삼아 세상으로부터 거세당한 모든 연약한 것들을 위로한다.
<라>
기타교습소에 다니던 소년은 선생님에게서 기타음정을 조절하기 위한 ‘전화기 사용법’을 배운다. 바로 전화기의 ‘삐…’ 하는 착신음이 정확한 ‘라’음이 라는 것. 수화기를 들고 기타를 연습하던 소년은 어느덧 자라 군대에 간다. 그러나 군대에서 불의의 사고로 한쪽 손을 다치게 되고, 의가사 제대 뒤 친구들과 담을 쌓고 살아간다. 대신 걱정스런 어머니의 눈길을 피해 오랜만에 ‘라’한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정확한 ‘라’음은 어디서든지 알 수 있거든요.” 기타선생님이 가장 간편하고 변함없는 음정 맞추기를 가르친다. 그저 수화기를 들고 귀를 기울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안전한 ‘바로미터’는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공간 혹은 단계로 접어들기 전의 줄맞춤, 그리고 이어지는 불안과 막막함. 그것은 늘 혼자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전지현, 박신양 주연의 으로 장편데뷔하는 이수연 감독은 2000년에 선보인 단편 <물안경>을 통해 거대한 사회라는 수조 속으로 물안경 없이 뛰어들어가야 하는 여대생의 막막한 두려움을 세심하게 그려냈다.
<라> 속의 청년도 마찬가지다. 졸지에 장애인이 되어버린 그는 ‘남들보다 조금 빨리’ 제대한 것도, 인정하기 힘든 자신의 핸디캡도 친구들에게 알릴 용기가 없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대화 역시 스스로 차단한다.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이제는 음을 좀 맞출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음을 내고 있는 청년은 그렇게 수화기 너머 정확한 ‘라’음에만 집착한다(감독은 영화 초반부 마치 기타강사를 ‘그녀’라고 생각하게끔 트릭을 쓰지만 ‘그녀’의 실체는, 프랑스어의 여성형 정관사와 같이, 음표 ‘la’이다). 그러나 한결같던 ‘la’ 역시 결국엔 ‘다이얼이 늦었사오니…’라는 불평을 지나 ‘삐삐삐삐’하는 거부의 발악을 해댄다. 더이상 피할 곳은 없다. 더이상 지체할 수도 없다. 이제 물안경을 벗을 때가, 수화기를 내려놓을 순간이 된 것이다.백은하 luci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