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림병호의 영화이자 한석규의 영화, <이중간첩>

1960년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는 남과 북, 그 어느 쪽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해 중립국을 선택하는 인물 이명준이 등장한다. 제3국을 향하는 배에서 투신한 그의 죽음에서 작가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개인의 좌절을 그렸다. 제목 <이중간첩>이 시사하듯 이 영화의 주인공 임병호 역시 남과 북,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된다. 혁명과업을 위해 몸에 총알이 박히는 아픔을 감내하고 살이 찢어지는 지독한 고문마저 이겨낸 그는 어찌하여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됐는가 얼핏 미스터리 플롯의 첩보액션물 분위기를 풍기지만 <이중간첩>이 숨기고 있는 야심은 온전히 역사의 희생자가 되고 만 한 인물에 대한 초상을 그리는 것이다. 지난 3년간 스크린에서 볼 수 없던 한석규가 출연을 결심할 만한 이야기인 셈이다.

임병호가 혹독한 고문을 견디며 위장귀순에 성공하는 도입부를 거쳐 본격적인 드라마가 시작되는 지점은 임병호와 윤수미의 만남이다. 남한에서 나고 자란 고정간첩 윤수미는 하루빨리 당의 명령을 실행하고 싶어 조바심을 내는 임병호에게 정체모를 안도와 위안을 제공한다. 그녀가 교회 바자회에서 산 라이터를 전해줄 때, 24시간 감시받으며 살아가는 임병호의 삶에도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남녀 사이에는 두명의 중재자 혹은 감시자가 등장한다. 북의 고정간첩 송경식과 안기부 간부 백승철이 그들. <이중간첩>에서 두 사람은 임병호와 윤수미의 아버지상으로써 북한과 남한이라는 적대적 체제의 이중적 모습을 드러낸다. 역설적이게도 이들 두 아버지는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임병호와 윤수미의 만남을 주선한다. 백승철은 남한에 와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임병호의 건조한 삶에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노라 말하고, 송경식은 북의 지령을 하달하기 위해 윤수미를 연락책삼아 임병호와 의사소통한다.

갈등의 폭발은 송경식이 체포되면서 이뤄진다. 임병호는 안기부 고문실에서 얼굴을 몰랐던 아버지와 대면한다. 그리고 아버지 송경식의 조국과 또 다른 아버지 백승철은 아들에게 제 아비의 다리를 각목으로 내리치길 요구한다. 머리에 총구멍을 내라는 지령을 내린다. 아직 세상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아들은 의심치 않고 아버지의 법을 따르려 하지만 그의 연인이 흘리는 눈물 앞에서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최초의 인간처럼 그들은 비로소 수치심에 몸을 떤다.

남과 북, 두 체제에서 버림받는 연인의 이야기를 신화의 틀에 부어 주조한 <이중간첩>의 구조는 제법 탄탄하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의 김성복 촬영감독이 만든 안정감 있는 화면과 김석원의 사운드디자인도 최근 영화 가운데 돋보이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구조적 장점과 기술적 숙련도에 비해 <이중간첩>의 감정 연출은 서툴고 투박하다.

무엇보다 <이중간첩>은 역사의 상흔과 실존적 고뇌를 모두 임병호,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한석규의 표정에서만 찾으려고 든다. 영리하고 섬세한 배우 한석규는 자신이 전달할 감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홀로 전체 영화를 끌고 갈 수는 없다. 임병호의 흔들림은 송경식, 백승철 또는 다른 조연들을 바라보는 동안 일어나는 것일 텐데 카메라는 번번이 한석규의 얼굴에만 머문다. 영화는 누구와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윤수미의 외로움을 돌보거나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간직한 송경식의 인품을 들여다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극 후반부에 백승철이 임병호가 보낸 편지를 읽는 순간, 별다른 울림이 전달되지 못하는 것도 전반부에 임병호와 백승철의 감정적 연대감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탓일 것이다.

아마 이번이 데뷔작인 김현정 감독은 몇 가지 상반된 길에서 다소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이중간첩>은 분단이라는 장애에 부딪힌 연인의 멜로드라마일 수도, 80년대와 냉전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정치드라마일 수도, 정치적 음모에 포위된 인간이 이데올로기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성장의 드라마일 수도, 개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위험에 빠진 남자의 운명을 그린 비극일 수도 있었다. 영화는 그 모든 것에 도전하지만 그것이 매듭지어지는 대목에선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서둘러 예상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나선다. <광장>의 이명준과 <이중간첩>의 임병호가 갖는 근본적 차이는 이런 것이다.

<이중간첩>의 역사적 배경

68년 이수근 검거사건

전세계에서 유일한 남북 대치상황이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배경이 됐듯 <이중간첩> 역시 분단의 비극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체제간 경쟁에서 비롯된 스파이 전쟁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상황이지만 한반도만은 아직 간첩에 관한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곳이다. <이중간첩>은 실화를 그린 영화는 아니지만 80년대 정치상황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다. 영화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진 않지만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여러 가지 간첩사건이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특히 1968년 이수근 검거사건은 <이중간첩>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1967년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은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를 취재하다 유엔군쪽 대표의 승용차에 올라타 월남, 귀순했지만 1968년 위장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 이수근은 한국 정부의 수사가 시작되자 홍콕, 방콕을 거쳐 호치민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체포, 군용기편으로 압송됐다. 끊임없이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1969년 상고심 재판 계류 중 사형이 집행돼 수많은 의문을 남긴 채 사라졌다. <이중간첩>은 이런 잊혀진 역사를 돌이켜보게 만든다.

조작간첩단 사건도 마찬가지. 1964년 인혁당, 1967년 동백림, 1968년 통혁당, 1974년 민청학련, 1979년 남민전 등 굵직한 간첩단 사건이 90년대 들어서야 조작의 실체를 드러냈는데 이 영화는 이런 일이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를 암시한다. 또한 <이중간첩>에서 위장귀순한 임병호가 안기부에서 처음 맡은 임무는 북파간첩을 교육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남과 북, 양쪽에서 경쟁적으로 간첩침투를 했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중간첩>의 이야기가 허황돼 보이지는 않는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