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네명의 독립영화 감독들이 ‘성’(性)을 소재로 만든 네개의 옴니버스영화. <원적외선>: 총각귀신과 젊은 낭자의 하룻밤, 옹녀와 변강쇠의 힘겨루기, 변학도와 이몽룡을 동시에 넘나드는 이색 춘향전으로 이어지는 고전 섹스스토리. <Macho Hunters>: 밤 10시에 인터넷사이트를 통해 ‘조선’의 마초들을 심판하는 집행자들, 그리고 그에 맞서는 해병대 전우회, 그들 사이의 싱거운 혈투. <BODY>: 몸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중년 여성과 몸을 움직이기 힘든 하반신 장애자 소녀와의 공중 목욕탕 입욕기. <하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나타난 여자와 중학교 도덕 선생과의 맞선 ‘하기’.
■ Review
경제 심급의 논리와 독립영화라는 ‘상대적’ 소수의 지향성이 서로 잠식당하지 않고 어울리도록 하기 위해 선택된 영토는 다름 아닌 ‘성’(性)이다. 자본은 회수되어야만 한다. 그러면서도 독립영화의 정신은 잃지 않아야 한다. 영역은 비옥해지면서 넓어질 것이다. 아마도 이쯤이 시작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자성어>에서 이지상, 이송희일, 유상곤, 김정구 네 감독에게 성이라는 소재는 끊임없이 흥미를 집약하면서도 아젠다를 비뚤게 해서는 안 되는 무언의 이중약속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사자성어>의 네명의 감독들은 그 약속을 지키는 방법이 조금씩 서로 다르다. 성은 소재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스타일의 차이들로, 또는 성을 빌미로 말하고 싶어하는 다른 결어들로 치닫는다. 우선 <사자성어>에서는 이런 갈림길에 서야 한다. 인물들은 성에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원적외선>(이지상)과 <하지>(김정구)에는 섹스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Macho Hunters>(이송희일)와 <Body>(유상곤)는 섹스장면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생각보다 중요한 지점이다.
원색적이고, 적나라하며, 외설적이고, 선정적인 <원적외선>은 소리의 구성짐(?)과 문자 텍스트의 유희가 뒤섞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전의 핵심을 찌르기도 하고, 때로는 비틀어 새로운 에피소드를 짜내기도 한다. 총각귀신과 젊은 낭자, 또는 변강쇠와 옹녀는 그렇다고 해도, “그 거웃”에 샤넬 5를 뿌리고 변학도와 이몽룡을 동시에 휘두르는 춘향의 행실은 단지 유머의 수준을 넘어선다. “방사가 잡다해야 정이 도탑게 쌓이는 것”처럼, <원적외선>은 속어와 욕설의 구전에 충실하면서 해학의 정점에 이르려고 한다. 쌩쌩한 “좆”과 “보지”들의 섹스를 소리하던 소리꾼 “헌 좆”은 인생무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아무도 그뒤로 그를 보지 못했다. <원적외선>은 섹스를 가릴 것 없는 놀이로 보여준다. 약속은 가장 원칙적으로 이행되고 있으나, 효과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도 섹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하지>에는 교성이 없다. 맞선을 보는 두 남녀, 여자는 옷에 우유(!)를 흘리고, 남자는 흥건히 땀을 흘린다. 그것이 옷을 벗고 섹스를 하는 당연한 이유가 된다. “지금 뭐 하세요”, 체위를 물어본다고 생각한 순간 다른 대답이 돌아온다. “예, 중학교 선생입니다. 도덕…” 직업을 물어보기도 전에 벌어지는 <하지>에서의 섹스는 서로의 예의 관계를 앞지르는 인간관계상 또 다른 겉치레이며 순서일 뿐이다. 그 이상한 전후의 뒤바뀜을 거치며 성에 대한 관성의 수순들이 떨어져 나간다. 무표정한 인물들과 읊조리는 대사들이 섹스를 단지 반복되는 동작으로 보이게 하면서 쓴웃음의 자리를 찾아준다. 마지막 시퀀스의 모호한 태도(마치 그 모든 섹스들이 일상의 모든 공간에서 벌어져야만 하지 않겠느냐고 역설하는 것처럼 보이는)를 제외한다면, <하지>는 ‘사자성어’ 중 가장 무기력하며, 무관심한, 불감증의 성욕을 의도하는 영화일 것이다.
<Macho Hunters>와 <Body>에서 섹스는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성’은 이 두 영화에서 섹슈얼리티로 이해되고 있으며, 그것에 기반하여 한축으로는 남성들의 동성사회적인 부패한 질서들을 질타하고, 또 한축으로는 그 관계를 여성 결연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면서 끌어안는, 비판과 연대의 양극으로서의 담론을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마초적 사회질서 속에서 피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 ‘안티마초닷컴’의 일원들은 상징적이다. 사실상 그들 개개인의 과거 흔적이 드러나는 경우는 이 영화 안에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상징적 전투가 대상화하는 것 또한 상징으로서의 적이다. 인물들의 구체적인 개인역사 대신 그 집단구성의 정당함이 해병대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당연시하게 만든다. <사자성어>의 나머지 영화들이 옷을 벗어버리고 성에 대해 접근할 때, <Macho Hunters>는 거꾸로 그 타도의 대상에 옷을 입힘으로써 역설의 ‘쾌’를 발휘한다. 가장 부드러운 시선을 지니고 있는 영화는 <Body>인데, 거기에는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몸의 차이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공유가 아니라 차이, 그것이 서로를 건네다보던 수직의 공간에서 벗어나 공중목욕탕이라는 그들만의 장소에 들어서면서 관계를 성립시킨다.
<사자성어>는 <원적외선> <Macho Hunters> <Body> <하지>의 순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는 굳이 그 순서를 따라 생각할 필요도 없고, 하나의 소재라고 해서 네편의 모든 영화에 다 관심을 표명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 네편의 영화들은 때론 서로의 관점에 대한 반대의사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꿰매야 하는 것은 그 ‘동종들의 이질성’이다. 이 영화들에 근거하여 <사자성어> 옴니버스를 이해하는 것은 ‘즐기고, 분노하고, 감싸안고,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한개의 공유점, 즉 여기서의 성(性)은 서로 다른 생각들의 접점과 확장, 또는 충돌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골리앗을 앞에 둔 다윗이 할 일이다. 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