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치달을 무렵, 병사로 전투에 임하고 있던 한 유대인 이발사(찰리 채플린)는 부상당한 장교 슐츠를 도와 전투기를 함께 타고 전장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나 연료가 떨어져 전투기는 추락하고 이 사고로 인해 이발사는 기억을 잃게 된다. 세월이 흘러 이발사의 조국 토마니아에서는 힝켈이라는 독재자가 나타나 군비를 확충하고 유대인들을 심하게 탄압한다. 이런 영문을 모르는 이발사는 병원을 탈출, 자신의 이발소에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하지만, 결국 유대인 구역을 돌아다니며 악행을 일삼는 군인들과 마찰을 빚게 된다. 이웃에 살고 있던 한나(폴레트 고다르)는 그가 겁도 없이 군인들과 맞붙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이때 힝켈은 이웃국가 박테리아의 독재자 나폴로니가 자신보다 먼저 오스테리히를 침공한 사실을 알고 분노한다.
■ Review
채플린을 안다는 것은 바로 지구인임을 의미하는 것, 이라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폭력적인 일이 되겠지만, 적어도 그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점에는 그다지 의심의 여지가 없다. 60년이 넘는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다시 찾아온 <위대한 독재자>만 두고봐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관객에게 이 영화는 전쟁 중의 비행기 사고로 기억을 잃은 채 고향에 돌아온 이발사 찰리 채플린만큼이나 시대착오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위대한 독재자>가 ‘낡은’ 영화라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채플린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2차대전이라는 역사적 시간을 가로질렀던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두 영화를 좀더 역사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두편의 영화 가운데 <인생은 아름다워>야말로 진정 ‘시대착오적’인 작품으로 보일 것이다.
채플린이 <위대한 독재자>와 관련해서 남긴 말들 가운데, 생각건대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내가 유대인 수용소의 저 처참한 비극을 알았더라면 <위대한 독재자>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치의 종족말살이라는 광적인 행위는 웃음거리로만 다루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문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별 보잘것없는 소박한 이미지의 작가로 간주되곤 하는 채플린이 사실은 이미지의 윤리학에 관해 사유하고 있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채플린의 말을 떠올려볼 때, <위대한 독재자>는 아우슈비츠 ‘이전’의 시간이 탄생시킨, (설령 ‘걸작’은 아니라 할지라도) 여전히 가장 감동적인 영화 가운데 하나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아우슈비츠 ‘이후’의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해서는 감히 그렇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진정 우리로 하여금 전율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순간은 베니니가 수용소 구석에 끌려가 총살당하는 순간이 아니라, 사실 그걸 보면서 감동을 받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인 것이다.
채플린이 일견 소박한 휴머니즘을 설파하기 위해 <위대한 독재자>에서 제시하는 두 인물은 토마니아의 독재자 힝켈과 그곳 유대인 거주지에 살고 있는 이발사이다. 이 둘은 모두 채플린 자신에 의해 연기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 둘 간의 차이가 아니라 유사성이다. 미치광이 독재자와 선한 이발사를 하나로 놓고 <위대한 독재자>를 다시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분명 선과 악은 개개의 인간에게 부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자질을 활용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에 붙여지는 이름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이발사뿐 아니라 독재자 힝켈에게서조차 우스운 광대 찰리, ‘예술가’ 찰리의 모습을 본다. 또한 그 둘은 모두 대단한 몽상가들이다.
다만 한쪽은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거대한 야심을, 다른 한쪽은 “이성의 세계, 과학과 진보가 우리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러한 세계”의 창조가 가능하리라는 커다란 환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 야심은 이미 좌절되었고, 아름답지만 소박한 환상은 앞으로도 결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영화 마지막을 길게 장식하는 연설장면에서 채플린은 사실 힝켈도 이발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이 되어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이 목소리는 급기야 공중에서 들려오는 계시적인 목소리가 되어, 절망한 채 쓰러져 있는 여인 한나의 머리 위로 울려퍼진다(“위를 봐요, 한나!… 인간은 이제 무지개를 향해, 희망의 빛을 향해, 영광스러운 미래를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따라서 <위대한 독재자>가 ‘여전히’ 지니고 있는 힘은 결국 그 명시적인 주제보다는 이미지와 사운드로부터 찾아야 한다. 영화 도입부, 1차대전 중의 한 전장을 미끄러지던 카메라는 거의 기괴하게 보일 정도로 포신이 길고 커다란 장거리포 옆에서 멈추어 선다. 거기서 튀어나온 포탄은 포신 바로 아래 떨어져 사람들을 위협한다. 대중을 선동하기 위한 힝켈의 장황하고 요란한 연설은 채플린의 입을 통해 기괴하게 발화되면서 히틀러의 연설이 담긴 뉴스릴에 대한 유쾌한 패러디가 된다. 이웃 국가 박테리아의 독재자 나폴로니에게 세를 과시하기 위해 힝켈과 가비츠가 애써 준비한 일련의 거창한 행사들, 궁정 이발소 의자에 나란히 앉은 힝켈과 나폴로니가 서로 질세라 자신들이 앉은 의자를 자꾸 높이는 모습, 심지어 힝켈 암살을 제의한 슐츠의 주도로 이루어진 만찬장면까지, (영화 마지막의 연설을 제외하면) 장황하고 높고 커다란 모든 것은 <위대한 독재자>에서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한편, “당신은 아리안족(arian)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발사는 “전 채식주의자(vegetarian)인데요”라며 간명하게 응수한다. <위대한 독재자>는 지금도 사라졌다고는 보기 힘든 거대한 광기들에 대한, 이미지/사운드를 통한, 무력하지만 진심이 담긴 저항이다. 하지만 독재자 아데노이드 힝켈의 모델이 되었던 아돌프 히틀러의 진정 ‘위대한’ 계획, 종족말살이라는 계획에 대해서는 채플린도 끝내 웃을 수 없었다고 말한 바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디지털 시대의 <위대한 독재자>는 그저 채플린 후기의 ‘쓸쓸한’ 걸작들 이전, 아직은 유쾌한 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영화 정도로밖에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