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은수(이미연)와 호진(이얼) 부부는, 결혼 안 한 호진의 동생 대진(이병헌)과 한집에 산다. 부부 사이의 애정도 각별하고 형제간에, 형수와 시동생간에 사이도 좋아 보이는 이 가정에 불행이 들이닥친다. 카레이서 대진이 경기에서 사고를 당하고, 같은 시간 동생의 시합을 보러 가던 호진도 교통사고를 맞아 둘 다 식물인간이 된다. 1년 뒤 먼저 깨어난 대진이 자신이 호진이라고 주장한다. 습관이나 취향도 호진과 똑같다. 병원에서는 빙의(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것)의 가능성을 얘기한다. 호진의 영혼이 대진에게 들어갔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은수는 대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럽고, 호진은 깨어날 줄을 모른다. 급기야 은수 부부 둘만이 겪었던 일들을 대진이 소상히 기억해내자 은수는 대진을 호진으로 받아들인다.
■ Review
<중독>의 헤드카피는 ‘한 영혼을 사로잡은 지독한 사랑’이다. 조금 이상하다. 순수하거나 정열적이어서 영혼을 사로잡았다면 몰라도, 지독해서 영혼을 사로잡았다는 말은 아무래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눈치빠른 이는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빙의’라는 모티브를 내세운 <중독>은 육체의 유한성까지 초월하는 숭고한 사랑 이야기일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후반의 반전을 거치면서, 도의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납득하기 힘든 넋나간 사랑이 전면에 나선다.
그러니까 <중독>은 멜로영화들이 부추기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깨는 영화다.그러나 멜로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 믿음을 깨면서 사랑에 대한 다른 빛깔의 믿음 하나를 들이민다. 거칠게 비유해 <번지점프를 하다>의 사랑을 <베티 블루>의 사랑이 밀어내는 것과 비슷하다. ‘솔 메이트’(영혼의 짝) 같은 운명적, 이상적 사랑이 깨지고 그 자리에 무모하리만치 집요한 의지적 사랑이 들어선다. ‘한 영혼을 사로잡은 지독한 사랑’은 영혼의 사랑(또는 그것에 대한 믿음)을 밀어낼 만큼 집요한 사랑에 다름 아니다.
형수와 시동생의 이 기이하고 기구한 관계를, 두 가지 다른 빛깔의 사랑을 대조시키며 펼쳐 보이는 <중독>의 시도는 신선하다. 실제로 ‘영혼의 짝’을 믿든, 사랑에 눈먼 맹목의 열정을 꿈꾸든 낭만적이기는 다 마찬가지지만 둘은 사랑관은 물론 세계관까지도 다를 수 있다. 전자는 종교적·보수적이고, 후자는 세속적·공격적인 측면이 강할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유추는 다분히 관념적이다. 구체적인 사람과 사연 속으로 들어가면 많은 역설이 발생할 것이다. <중독>이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두 빛깔의 사랑이 갈등하거나 뒤엉키기보다, 시간순으로 병치된다. 또 전자는 은수에게, 후자는 대진에게 투영돼 따로따로 전개된다.
은수는 남편 호진을 더없이 사랑하고 남편도 마찬가지다. 남편에게서 죽은 아버지의 체취를 맡는다는 은수는 호진을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로 운명적 사랑을 믿는다. 그녀라면, 빙의를, 육체를 뛰어넘는 영혼의 사랑을 다른 사람보다 쉽게 받아들일 것 같다. 은수가 대진을 받아들이고 곧이어 반전이 일어날 때까지, 영화는 은수의 시점에 선다. 은수가 모르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뿐 아니라 징후나 조짐의 안배에도 인색한 이 구성에는 납득하기 힘든 게 있다. 반전을 위해 숨기는 건 이해가 가지만, 반전의 효과와 여운을 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장치가 없다. 3분의 2까지, 영화 속 사랑은 ‘영혼의 짝’이 만나는 운명적 사랑의 단일한 빛깔이다.
반전과 함께(반전의 내용을 말할 수 없는 이 답답함!) 사랑의 색이 바뀐다. 이제껏 몰랐던 대진(또는 호진)의 과거사 속에서 ‘지독한 사랑’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 앞에 은수는, 은수가 믿었던 사랑은 무기력하다. 영화는 임신 같은 요인을 등장시켜 은수의 선택의 폭을 줄여버린다. 그리곤 모든 명분을 다 포기하고 볼품없이 남은, ‘지독한 사랑’에 연민을 보낸다. 그 시선이 따뜻하지만, 사랑에 대한 개념들이 캐릭터보다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 호진, 은수 부부와 동생 대진은 함께 산다. 더없이 단란해 보이는 이 트라이앵글은, 대진이 카레이싱에 출전하던 날의 사고로 산산이 깨어진다.(왼쪽부터 첫번째 두번째)♣ 깨어난 대진은 자신이 형 호진이라 주장한다. 시동생으로 대할 것인가, 남편으로 대할 것인가, 혼란스럽던 은수는 대진의 육체를 빌려온 호진을 받아들인다.(세번째 네번째)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개념들로 골조를 세우는 데 공을 들인 것에 비해, 그 위에 캐릭터의 질감을 입히는 작업에는 정성을 덜 쏟은 듯하다. <중독>을 보는 건 많이 마른 사람의 몸매를 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은수를 멍청할 정도로 나약하게 묘사하든가, 대진의 무섭도록 집요한 면모를 처음부터 보여줬다면 둘의 사연이 더 많은 물기를 담을 수 있었을 텐데 영화의 중반이 지나도록 둘은 평균인에 가깝게 그려진다. 자유직 종사자, 전원주택 등 사회를 떠나 섬으로 도피하려는 한국 멜로의 보편적 경향도 공유한다.
그러나 담백한 맛이 살아 있다. 빛깔 다른 두 사랑의 병치를 같은 톤의 화면으로 이어내는 차분한 연출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 이병헌, 이미연 두 배우는 영화를 떠받치는 기둥처럼 보인다. 미세한 표정의 차이로 영화의 완급을 조절하고,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안에 복잡한 감정을 담아 전하는 이들의 연기가, 자못 관념적으로 비칠 수 있는 이 이야기에 사람의 체취를 불어넣는다. 임범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