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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영상의 건조함,<낙타(들)>
2002-09-23

■ Story

40대 초반의 남자(이대연), 30대 후반의 여자(박명신)가 서해 안의 포구로 여행을 떠난다. 월곶이라는 곳에 도착한 둘은 저녁을 먹고 한적한 시간을 보낸다. 서로의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도 한다. 노래방에 도착한 두 사람은 노래를 부르다가 어색하게 입을 맞춘다. 모텔에 들어간 뒤 남녀는 성급하게 관계를 맺고 야식을 먹으며 지난 시간을 이야기한다. 학창 시절에 관한 추억들이다. 남자는 우리가 좀더 나이가 어렸을 때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고 묻는다. 아침이 오고 남녀는 모텔에서 나와 다시 식당으로 향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 Review

한쌍의 중년 남녀가 냉면을 먹고 있다. 잘근잘근 면발을 씹으면서 둘은 조용하게 식사를 한다. 시간은 한밤중이고 장소는 모텔방인 듯하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각자 가정을 가진 사람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인연으로 마주친 이들일까? <낙타(들)>은 어느 불륜에 관한 영화다. 마흔을 넘은 남자와 아직 그 나이에 이르지 못한 여자가 만나 몸을 섞고 하룻밤을 지낸다. 하지만 영화는 친절하게 이들의 마주침과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남녀의 과거와 현재에 관해 스스로 그림을 짜맞추면서 추측해보게 된다.

<낙타(들)>은 박기용 감독의 영화다. <모텔 선인장>(1997)에서 그랬듯 박기용 감독은 특정 공간을 매개로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스크린에 재현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연출자는 '모텔'을 중요한 장소로 삼는다. 어색했던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는 곳, 그리고 육체적인 만남을 갖는 곳이다. 영화는 남녀의 불륜에 관한 한편의 보고서와 같다. 이 보고서는 여느 상업영화와는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낙타(들)>은 불륜에 관한 사회적이고 생물학적 관찰을 담는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 커플은 서로 쉼없이 대화를 나누지만 대화는 공허하고 대부분 의례적인 것이다. "두통이 있다면 담배를 덜 피우는 게 나을 거예요." "생선 좋아한다면서 왜 국물만 드세요?" 이런 식이다. 당연하게도 대화는 겉돌고 상대방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낸 사람들은 다시 헤어진다. 먹고 마시고 섹스를 한 뒤, 그리고 식사를 한 뒤, 이들은 차를 타고 처음 장소로 되돌아간다. 막막하고 탈출구 없음의 상태를 영화는 흑백영상으로 건조하게 보여준다.

<낙타(들)>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화다. 남녀가 자동차와 모텔방, 그리고 식당을 오가는 동안 카메라는 등장인물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연기자의 연기는 즉흥연기에 많이 의존했다. 영화의 톤은 시종일관 무덤덤하고 때로는 무거운 짐을 진 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들의 행렬을 연상케 한다. <낙타(들)>은 올해 프리부르영화제 대상 수상작이며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wherever7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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