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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기타노스타일 로드무비 <기쿠지로의 여름>
2002-08-27

■ Story

할머니와 둘이서 사는 초등학생 마사오(유스케 세키구치). 아빠는 돌아가셨고 돈 벌러 멀리 가셨다는 사진 속 엄마는 소포만 부쳐온다. 마사오의 이웃에는 빈둥대는 전직 야쿠자 기쿠지로(기타노 다케시)와 말투는 무서워도 마음은 착한 그의 아내 미키(기시모토 고요코)가 산다. 여름방학을 맞아 가족과 시골로 놀러간 친구들 뒤에 홀로 남은 마사오는 소포의 주소에 사는 엄마를 찾으러 길을 나서자마자 동네 불량배들한테 괴롭힘을 당한다. 이를 목격한 미키는 기쿠지로에게 마사오를 동행하도록 한다. 경륜과 술로 여비를 날리고 출발한 둘의 여행은 어이없는 히치하이크로 이어지고 길에서 만난 낯선 괴짜 어른들은 모두 마사오의 그림일기에 추억을 남긴다.

■ Review

“내 영화 속 폭력의 의미를 묻는 외국 기자와 평론가들의 질문이 지겨워서 다음에는 폭력이 전혀 없는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고 1998년 로테르담영화제에서 기타노 다케시가 선언했을 때,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의 천연덕스런 조크거니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담이었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번개처럼 젓가락으로 적의 눈을 쑤시는 대신 수영장에서 튜브를 끼고 물장구를 친다.

물론 전직 야쿠자 기쿠지로는 바람직한 베이비시터가 못 된다. “너네들 정신 안 차리면 커서 이 인간 꼴 난다!”고 남편을 손가락질하며 동네 불량배들한테 호통치는 호랑이 아내에게 등 떠밀려 아홉살 꼬마 마사오의 보호자가 되긴 했지만, 기쿠지로는 타인과 접촉하고 사회적 행동 규범에 적응하는 일에 마사오보다 더 미숙하다. 상대가 누가 됐건 일단 속임수를 쓰려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다짜고짜 모욕하고 그도 안 통하면 주먹을 내지른다. 그렇다고 속임수가 교묘하거나 한 것도 아니다. 택시를 훔쳐놓고는 기어도 제대로 못 넣고 히치하이크 솜씨는 더 한심하다. 그저 공손히 부탁하면 풀릴 문제인데 보는 사람마다 대뜸 유치한 별명을 붙이고 윽박지르기 일쑤인 그는 쉴새없이 매를 벌고 말썽을 청한다. 한편 그런 기쿠지로가 첫눈에 “우울한 녀석”이라고 평가하는 꼬마 마사오는 만사에 별로 기대가 없는 말수 적은 왼손잡이 소년. 친구들이 모두 가족과 피서를 떠난 여름방학의 어느 날 혼자 외로이 밥 먹고 숙제하고 공을 차던 마사오는 문득 돈 벌러 멀리 갔다는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소포만 부쳐오고 마사오를 찾지 않는 엄마에게는 돈벌이 이외의 사연이 있다. 기쿠지로가 먼발치에서 요양소의 한 노부인을 바라보는 귀로의 삽화가 암시하듯, 남자와 소년은 모두 버림받은 아이다.

♣ <기쿠지로의 여름>의 러닝 개그는 황당함으로 얼어붙은 정지장면들(왼쪽에서 첫번째)♣ ˝우울한 녀석이군.˝ 기쿠지로는 처음 본 마사오의 인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경륜으로 여비부터 날리고 시작한 마사오와 기쿠지로의 여정은 무전여행에 가깝다.(두번째, 세번째)

대책없는 어른과 해맑은 아이의 듀엣, 그리고 그들이 여행을 통해 이루는 공동의 성장을 그린 플롯은 구태의연한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 평이한 이야기에 온통 기타노 다케시 스타일의 지울 수 없는 지문을 묻혀 특별한 로드 무비로 만들었다. <그 남자 흉포하다> <소나티네> <하나비>의 관자놀이를 관통한 정적과 폭력의 폭발적 충돌은, 동화적인 여름의 초록빛 속에 자취를 감췄지만,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3원소로 불리는 코미디와 폭력, 센티멘털리즘은 함량을 달리할 뿐 <기쿠지로의 여름> 안에 그대로 고여 있다. 세 요소가 어우러지는 양상은, 흉포한 생을 살아온 사나이의 감상적 에필로그 <하나비>와 비슷하지만 좀더 천진하고 가볍다. 기쿠지로가 때리고 맞을 때 카메라는 아주 멀찍이 물러서거나 딴청을 부린다. 카메라는 시종 짓궂다. “누가 널 데려가야겠구나!” 하는 대사는 어정쩡하게 나란히 선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투 숏으로 이어지고, 열심히 남의 차바퀴를 빼는 기쿠지로에게서 카메라가 물러나면 그의 작업을 구경하는 차 주인이 보인다. 하이쿠 혹은 네컷만화를 연상시키는 기타노 다케시 특유의 함축적 리듬으로 연결된, 황당함으로 얼어붙은 활인화와 슬랩스틱은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개그의 요체다. 번역자 강민하의 명료하고 위트있는 자막도 <기쿠지로의 여름>의 코미디와 훌륭히 어울린다.

상황의 반전으로 마사오의 엄마가 사는 집은 영화의 대단원이 아니라 반환점이 된다. 돌아선 소년은 울고 남자는 거짓말로 달랜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알고보면 소년에게 가혹한 여정이다. 그러나 영화는 슬픔을 머금는 대신 까맣게 잊은 시늉을 하고 우연히 다다른 강가에 죽치고 앉아 마냥 시간을 보낸다. 기쿠지로의 지휘 아래 떠돌이 시인, 마음씨 고운 폭주족이 캠핑하며 벌이는 즐거운 놀이는 마사오와 함께 관객의 슬픔도 지워버린다. 세발 자전거 벨소리처럼 귓전에 굴러드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만이 영화의 정서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여행은 마사오와 기쿠지로의 인생에 극적인 상승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아니, 대단한 인격적 성숙이나 성격의 변화도 없다. 두 사람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엄마에게 외면당한 사랑에 굶주린 아들들이고, 앞으로도 교실에서 거리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존재로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두 사람에겐 이제 엄마를 다시 보고 싶을 때 같이 가 줄 친구가 있다. 붉은 해와 푸른 물, 더위에 들뜬 꿈으로 알록달록하게 채워진 일기장과 새로 사귄 친구들. 하긴 여름방학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도 그런 것들이었다. 김혜리 verme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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