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 Story
낡은 선풍기만이 작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적요한 한여름밤의 집안. 어머니와 딸이 있고 아버지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소녀는 제 몸에서 나온 피가 침대를 붉게 어지럽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초경인 것이다. 그리고 곧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아버지가 사고로 중상을 당했다는 소식. 병원을 찾은 소녀는 피로 물든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고 그만 도망쳐버린다.
■ Review
이 작품은 미장센단편영화제의 공포부문에 출품되고 또 수상까지 했지만 공포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공포영화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관객에게 공포감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극중 인물의 공포를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춘기>는 극중 인물이 느끼는 공포감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내러티브를 구사한다. 소녀에게 초경이 찾아온 날 밤 공교롭게도 소녀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마찬가지로 ‘피를 본다’는 이야기. 이는 너무나 우연적이고 개연성이 없는 설정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두 사건을 연관시킴으로써 극중 인물이 느끼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눅진한 느낌이 묻어나는 고른 톤의 영상과 절제된 대사가 하룻밤 소녀가 겪는 2개의 ‘재앙’을 드라마틱하게 전하는 작품. 피묻은 잠옷을 입은 소녀가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 등 강한 이미지의 장면들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있다.
<뒤통수 조심해라>
■ Story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 차를 세우고 사랑을 나누려던 연인, 애인을 빼앗아간 남자에게 복수를 하려는 남자, 빚에 몰려 물에 빠져 죽으려는사람, 그에게서 돈을 받아내려는 빚쟁이들, 폭주족들, 우범지대를 순찰나온 해병. 상반되는 다른 목적으로 심야의 개천변을 찾은 사람들이 서로간의
오해에 빠져 집단 난투극을 벌이게 된다.
■ Review
<뒤통수 조심해라>는 재치있는 영화다. 이렇게 짧은 러닝타임 속에 이렇게 많은 사연의 사람들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엮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에도 실마리는 있는 법. 영상원 출신 노진성 감독은 실 한 가닥을 잡고서 차분하게 실타래를 얽어가는 놀라운 이야기솜씨를 뽐낸다.
주인공은 변심한 애인의 새 남자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개천변에 이른다. 야구배트를 손에 들고 연인이 탄 차에 접근하지만, 그는 쉽게 이 복수에 성공하지 못한다. 아니 그러기도 훨씬 전에 딴 데다 힘을 다 써버린다. 다름아니라 개천물에 빠진 웬 남자도 구해줘야 하고, 살려놓은 다음에는 또 내친김에 그를 잡으러 온 빚쟁이들 2명도 때려눕히고야 말고, 그러고나면 또 자신을 널브러진 세 남자에 대한 폭력범으로 의심하는 해병과 난데없는 격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소박한’ 복수극을 벼렀던 한 남자의 주먹이 폭주족까지 말려든 집단 난투극을 부른다. 하룻밤 개천변에서 일어난 이 사건의 전체를 모두 아는 것은 주인공 남자와 관객뿐. 이 격렬한 한바탕 해프닝을 다 보고나면 정말이지 이 작품이 12분밖에 되지 않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복수의 엘레지>
■ Story
밤늦은 시각 어두운 골목, 술 취해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가는 어느 샐러리맨이 빨간 펜을 든 채 영어단어를 외우며 걷던 고3 여고생과 부딪힌다. 샐러리맨의 흰 셔츠에는 빨간 펜 자국이 길게 남지만, 남자는 여고생에게서 세탁비도 받지 않는다. 다시 귀가를 재촉하는 남자. 이번에는 소매치기 강도가 그를 덮친다. 남자는 강도의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골목길에 쓰러진다. 하지만 창문 너머로 이 광경을 보던 사람 중 누구도 그를 일으켜세우러 나오지 않는다. 1년 뒤, 우연히 남자는 소매치기 강도를 만나고, 그에게 복수를 한다.
■ Review
<복수의 엘레지>는 반전이 돋보이는 영화다. 주인공 남자가 복수를 하는 방식에도 반전이 있고 복수를 마친 뒤 영화의 결말에도 또 하나의 반전이 있다. 아니, 아예 초반부터 반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골목에서 부딪힌 여고생에게 해코지를 할 듯 할 듯하다가 안 하고 지나치는 장면에서부터 관객은 주인공 남자의 행동에 대한 예측력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웬만한 타인의 실수에는 너그러운 평범한 소시민. 그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가 1년이 흐른 뒤에야 통렬한 복수를 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내러티브상의 반전이 아니고도 마음을 울린다. 지난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작품. 감독 윤종석은 위의 두 작품의 감독과 마찬가지로 영상원 출신이다.최수임 sooee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