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초원
■ Story
산골소녀 향숙은 애물단지다. 오늘도 논두렁에서 골프연습을 하다 엄마에게 들켰다. 그 때문에 저녁식사에 끼지도 못하고 마당에서 벌을 서고 있다. 하지만 한끼 굶는 벌이야 향숙에겐 일과이고 약과다. 세계적인 골프선수가 되고 싶은 향숙, 그녀의 머릿속은 오후에 잃어버린 골프공 생각뿐이다.
■ Review
“이 가스나가 또 어디로 갔노. 이번에 잡히기만 해봐라” 공부는 물론이고 집안일도 뒷전인 딸 향숙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한 아낙네의 억센 목소리가 아니라면 인적이라곤 기척도 없는 산골 마을. 눈뜨자마자 잽싸게 집을 빠져나온 향숙은 ‘자신만의 필드’에서 한창 골프연습중이다. “3번 우드로 줘.” 어설프게 깎아 만든 골프채를 들고 ‘저 푸른 초원’을 향해 한껏 스윙을 하는 소녀. ‘나이스 샷’이라 외치진 못해도, 보조를 자청해서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남동생의 눈에는 이 말썽쟁이 누나가 위대해 보인다.
<저 푸른 초원>의 도입은 유쾌하다. 농기구를 개조해서 만든 골프채는 물론이고, 소가 먹어버린 골프공을 되찾기 위해 배설물을 뒤적거리거나 휘영청 뜬 보름달이 향숙의 눈엔 잃어버린 골프공으로 보인다는 설정도 보는 이를 미소짓게 한다. 하지만 골프장을 만들겠다는 심산으로 건설업자들이 진주하면서 카메라는 이내 ‘마주하고 싶지 않은’ 반전으로 이끈다. 이들로 인해 소녀의 호기심은 눈물로 바뀌고, 말 못하는 동생은 마음까지 닫는다. 다소 도식적인 비유로 끝을 맺지만, ‘흔해빠진 비극’이라는 부제와 중첩되는 순간 영화는 근대라는 괴물의 파괴 본능에 의해 일그러진 인간의 얼굴을 상기시킨다.
Lesson
■ Story
레슨비를 받아든 14살 소연은 피아노 학원이 아니라 대학생 지은의 집으로 향한다. 그녀와 공모해 레슨비의 반을 챙겨온 지 벌써 꽤 됐다. 얼마 뒤면 소연은 모은 돈으로 자신이 짝사랑하는 오빠 준형이 탐내는 멋진 전자기타를 선물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 Review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했어?” 소연이 난데없이 지은에게 묻는다. “성 경험이 있다고 하면 어린애로 안 보겠지.” 소연의 고민은 자신이 짝사랑하는 고등학생 준형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인 지연은 소연의 호기심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첫 경험’이 어땠냐는 질문에 보고 있던 책만 만지작거린다.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게 있음을 알아챈 소녀, 몸으로 직접 부딪혀보기로 한다. 실험대상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동갑내기 욱기. 하지만 맹랑한 소녀의 돌진에 질려버린 욱기가 급기야 줄행랑을 치면서 이마저 틀어진다.
<레슨>은 성장기 소녀의 내밀한 비밀일기다. 자그마한 금빛 열쇠로 잠그어놓아 더욱 열어보고 싶은. 물론 그 안에는 ‘성’에 대한 소녀의 호기심만이 들어 있진 않다. “내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믿던 시간과 정작 내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챈 시간 사이를 헤집고 싶었다”는 연출의 말처럼, 영화는 성장의 미로에 들어서기 직전 소연의 두근거림과 아직도 출구를 찾지 못한 지은의 열패감을 번갈아 그려낸다.
달이 지고 비가 옵니다
■ Story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살고 있는 어린 남매. 자신을 떼어놓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오는 밤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미꾸라지를 키우는 재미가 있고, 문둥이가 살고 있다는 집을 염탐하는 스릴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매는 그 문둥이 집에서 낯선 청년을 만나게 되고, 그가 보여주는 동전마술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 Review
호랑이에 쫓겨 하늘로 오른 동화 속 오누이는 달이 되고 별이 됐다던가. 하지만 영화 속 남매에게 주어지는 건 ‘동아줄’ 대신 ‘미꾸라지’ 한 마리다. 동전마술이 특기인 낯선 청년을 따라나선 소풍길에 누이는 성폭행을 당하고, 동생은 그런 누이의 눈물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엄마의 품이 아직 그리울 두 남매를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의 구덩이로 밀어넣은 것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도 어떤 위안이나 해결점을 찾지 못한 그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선물 하나를 주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인물의 심리를 사물의 떨림으로 치환해서 묘사하는, 서정적인 영상이 돋보이는 작품. 여기에 오누이에게 일어난 일이 악몽인지, 실제 사건인지 구별할 수 없게끔 만들어놓은 구성도 돋보인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이 수없이 교차하던, 유년 시절 감정의 진폭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키기 때문. 제3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영진 ant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