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아르메니아의 음유시인 사야트 노바의 생애를 그린 <석류의 빛깔>은 당대 소련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벗어나 시인의 세계를 감각의 정경으로 드러낸다. 서사적 연속성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은 자유로운 시적 언어가 되어 흐른다. 터진 석류의 붉은 과즙이 피부를 타고 흐르고 포도가 발밑에서 으깨지며, 중세 성화의 장식성과 원시적 색채를 이식한 화면은 주술적인 기운을 풍긴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은 각본, 감독, 안무, 의상, 프로덕션디자인의 세부를 직접 설계해 관객의 능동적 지각을 촉구하고 있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대사를 최소화하고 몽타주의 문법에서 이미지를 해방시킨 시도는 급진적인 형식 실험의 맥을 잇는다. 사물과 인물을 살아 있는 회화처럼 배치한 타블로 비방(활인화)의 이미지에서 결코 박제되지 않는 존재도 있는데, 시인 자신이자 그의 연인, 수녀, 천사 등 1인5역을 맡은 아르메니아 배우 소피코 치아우렐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