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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다른 매체, 다른 언어의 경계를 감각게 하는 번역 실험, <너는 나를 불태워>
조현나 2025-08-27

시인이자 소설가인 체사레 파베세의 저서 <레우코와의 대화>는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당시 짧은 유서가 적힌 채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은 <레우코와의 대화> 중 <바다 거품>을 영화화할 수 있겠다고 적은 과거 자신의 메모에서 출발해 <바다 거품> 을 스크린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바다 거품>은 고대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와 그리스신화 속의 님프 브리토마르티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사포는 실연의 고통으로 바다로 투신했으며 브리토마르티스는 미노스 왕의 구애로부터 도망치다 바다에 빠졌다. 영화는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 역을 맡은 두 배우의 목소리를 빌려 <바다 거품>의 대사와 여러 각주, 그리고 유실되지 않고 남은 사포의 시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너는 나를 불태워>는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신작이다. 아르헨티나와 미국, 이탈리아, 그리스, 페루, 스페인 등 여러 국가에서 16mm 필름으로 촬영된 푸티지가 활용됐다.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은 <바다 거품>을 영화로 옮기되 단순히 텍스트와 이미지를 병치하는 방식만을 택하지 않는다. 책에서 발췌한 대사와 각주는 두 배우가 낭독한 내레이션으로 삽입된다. 나아가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가 생을 얻기라도 한 듯 두 배우가 각 인물의 이름으로 서로의 번호를 저장한 뒤 휴대폰으로 텍스트를 주고받고, 서로 마주한 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다를 배회하는 두 배우의 몸짓, 텍스트를 직접 이미지화해 그리는 과정 또한 간헐적으로 제시한다. 작품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제시하기보다는 책과 시를 기반으로 가능한 모든 사유의 실험을 영화에 담아낸 것에 가까운 결과물이다. 사포의 시와 체사레 파베세의 글, 배우들의 대화는 출처가 모호한 채로 섞여들며 글만으론 체감할 수 없는 감상을 전한다. 사랑이 촉발시킨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의 불안, 공포, 공허, 그런 둘의 대화를 집필한 뒤 자살한 체사레 파베세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감케 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영화의 인상적인 부분은 한 문장을 어절로 나눠 낭독하고, 각각의 어절을 하나의 이미지와 연결한 장면이다. ‘너는/나를/불태워’의 세 어절이 세개의 이미지와 합치돼 하나의 시퀀스가 완성되는 식이다. 여러 차례 반복 상영되던 시퀀스는 종국엔 내레이션이 배제된 채 이미지의 나열로 변주한다. 관객은 이미지만 보고도 ‘너는 나를 불태워’를 읽어낼 수 있다. 해외 관객이기에 가능한 감상법은 소리와 이미지로만 구성된 이 시퀀스에 한글 자막이 더해지는 데에서 비롯한다. 앞서 영화는 ‘너는 나를 불태워’라는 문구를 희랍어, 스페인어, 영어로 인쇄한 뒤 시간차를 두고 종이들을 겹쳐 자연스레 번역을 행한 바 있다. 이처럼 다른 언어, 다른 매체를 오가며 시도된 번역 작업은 새로운 레이어로 덧대어진 자막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다른 언어 자막 혹은 자막 없이 소리와 이미지로만 구성된 시퀀스를 읽어낼 여타 관객의 체험을 상상하면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하며 말이다. 글, 소리, 이미지, 여러 언어를 기반으로 다양한 문학적 해석과 번역을 실험한 흥미로운 영화다. 2024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인카운터스 부문 공식 초청작.

close-up

실제 <레우코와의 대화>를 읽고 덮는 것처럼 표현한 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또 다른 시의 존재를 가늠하고 이에 대한 해석을 제안하는 장면들. 영화가 시도한 분석법을 또 다른 문학작품에 대입해볼 여지를 남기며 극을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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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아와 헬레나> 감독 마티아스 피녜이로, 2016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기반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번역하기 위해 뉴욕에 온 연극 연출가 카멜리아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특유의 방식으로 고전 텍스트의 현대적 해석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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