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촌 입시전형을 위해 엄마 손에 이끌려 지방 소도시 학교에서 전학 절차를 밟는 기준(이재준)은 서울 아닌 그 장소가 영 내키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기준의 어머니(고서희)가 담임 선생님과 교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신발장에 둔 기준의 아디다스 운동화가 사라진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복도를 비추는 CCTV는 고장이 나버려 누가 운동화를 가져갔는지 알 수 없다. 기준만이 느끼고 있던 찜찜함은 운동화가 사라진 이후로 기준의 어머니와 선생님에게도 전염되듯 옮아간다.
장병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여름이 지나가면>은 13살 기준이 전학 간 학교에서 보내는 여름 한철을 담는다. 2017년 첫 단편영화 <맥북이면 다 되지요>로 광화문국제단편영화제 국내경쟁 대상을 받은 장병기 감독은 2019년 <할머니의 외출>을 연출했다. 첫 번째 장편인 이 영화는 얼핏 보면 소년 시절의 한때를 다룬 성장영화로 보인다. 그러나 성장의 문턱에 선 아이들은 도둑질과 폭력, 욕설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중학생인 영문(최현진)은 13살 아이들 중에서 누구에게 호감을 보이고 누구를 무시하는지에 따라 서열이 뒤바뀐다. 영문이 휘두르는 거친 영향력을 충분히 누리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질병을 소년기의 증상처럼 미리 앓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학 첫날, 하룻밤 새 들른 마트와 식당 주인의 아이들이 하필 모두 기준과 같은 반이라는 사실은 묘한 위화감을 자아낸다. 기준의 어머니는 전학 턱으로 기준의 반에 햄버거를 돌리지만 영준(최우록)이라는 아이는 햄버거를 먹고서도 받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기준의 어머니는 아파트 입주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이지만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이웃 여자들과 재개발 반대 시위를 함께한다. 그러는 동안에 기준의 어머니는 영준에게 형 영문(최현진)이 있고 두 형제는 부모 없이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아직 어린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엿보이는 삐뚤어진 어른 남성 집단을 예고한다. 영화는 성인 남성의 것이었던 힘의 위계와 어른들에게 만연한 사회 계층적 위계를 모두 끌어와 영문과 영준 형제를 바라본다. 두 형제는 어떠한 보호자도 없이 방치된 아이들이다. 기준의 어머니를 포함한 동네 여자들은 두 형제를 안쓰러워하며 비행을 눈감아주지만 적극적인 보호의 손길은 내밀지 않는다.
영문과 그 친구들은 어떤 부류의 남자들이 만들어낸 질서와 힘의 논리를 모방하며 소년들 위에 군림한다. 기준은 왜인지 영문과 그가 제시하는 규칙을 흠모하며 배워가려는 초입에 서 있다. 비교적 혜택받은 환경에 있는 기준은 사회와 공동체의 사각지대에 있는 영문을 따라하려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다. 힘의 위계와 계층의 위계를 구분하지 못한 채 혼동하는 기준의 반항은 어른들에게 한때의 치기로 쉽게 해석되고 만다. 여러 인물과 소재가 서사에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가운데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것은 기준이 잃어버린 아디다스 운동화다. 운동화는 끝없이 오해를 불러오다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뒤 누구도 명확히 설명해내지 못하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출연배우의 대부분은 실제 미성년이지만 출연 분량과 역할의 크기에 관계없이 각자에게 걸맞은 긴장과 자연스러움을 부여해 관객이 이들 소년 세계에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close-up
기준은 영문의 허락 없이 다른 아이들의 돈을 빼앗는다. 보복하러 온 이웃 동네 소년을 영문과 영준, 기준이 린치한다. 셋은 영문의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밤공기에 무감한 두 형제와 새로운 풍경을 구경하는 기준의 얼굴이 나란히 비친다. 몇몇 장면이 다른 누구의 영화를 떠올리게 할지라도 어린 두 형제가 아스팔트 밤길에 익숙해진 이유는 그저 흘려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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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유년이 담긴 <로마>는 멕시코시티 로마 지역의 중산층 가족과 함께 사는 가정부 클레오의 시선 아래에 놓인다. 클레오는 안주인 소피아의 아이들을 험한 파도에서 구한다. 아이들은 조모 앞에서 클레오에게 자신들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뒤 곧 스무디가 먹고 싶다고 말한다. 진정으로 접촉할 수 없는 두 계층이 집이라는 한 공간에 있다. 맑고 부드러운 흑백 화면 아래 흐르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향수가 될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고단한 삶이었던 현실의 차가운 경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