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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짐승의 발톱으로 ‘조각’나버린 슬픔, 애수, 마음의 빗장, <파과>
이자연 2025-05-07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가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이제 60대 초로에 접어든 킬러 조각(이혜영)은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신성방역’의 전설이다. 희끔해진 머리칼과 왜소해진 체격은 주인 모르게 흘러버린 시간을 보여주지만, 노화된 손떨림에도 유연하게 미션을 처리하는 모습은 그의 건재함을 증명한다. 하지만 세월이 무디게 한 것은 그의 외형만이 아니리라. 작은 기척에도 빠르게 칼자루를 쥘 만큼 예민한 경계심을 지닌 그는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노쇠한 개 한 마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게다가 다정한 태도로 개를 치료한 수의사 강 선생(연우진)이 차 안에서 기절한 자신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각은 과거 스승 류(김무열)의 구원을 겹쳐 느낀다. 아무래도 나이듦을 통과 중인 여자는 따뜻한 온기를 더이상 거부하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멀찍이서 이 변화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같은 조직의 킬러 투우(김성철). 행동이 재빠르고, 치기 어리고, 야망 가득한 그는 젊음을 무기 삼아 대모가 된 전설에게 자꾸만 발을 건다. 파과의 사전적 의미는 ‘흠집난 과실’이다. 아무 문제없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파과의 외로움은 음성만으로 모든 장면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특히나 빠른 속도로 조화된 액션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이혜영을 탄생시키고, 동시에 미디어에서 볼 기회가 전무했던 노인 여성 킬러를 생동화한다. 암묵적으로 오랫동안 특정 이미지가 고착되었던 노인 여성의 모습을 전복시키며 명민한 다양성을 부여한 점도 눈에 띈다. 무질서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젊음과 나이듦의 전투는 생경한 엔터테인먼트인 동시에 언어로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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