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본능적으로 뛰어난 비행 실력으로 초고속 승진. 인스타그램 스타가 되어 <유 퀴즈 온 더 블럭> 출연까지. 자아도취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던 항공조종사 한정우(조정석)가 추문에 연루된다. 소속항공사 회식에 참석한 ‘개저씨’ 사장의 여성 차별적 발언에 동조하게 된 것. 해당 현장의 녹음본이 언론에 공개되자 사건은 곧장 ‘한국항공 성희롱 파문’이라 명명된다. 캔슬. 나락. 블랙리스트. 경솔한 잘못에 거대한 책임을 안고 해고된 그는 인맥을 동원해 재취업을 시도해보지만 한정우란 이름은 이미 업계 기피 대상이 되어 있다. 어느 날, 파일럿 채용을 하며 5 대 5의 강력한 성별 할당 정책을 시행한다는 한 항공사의 소식을 들은 그는 자신의 이름과 성별까지 버리기로 결심한다. 한정우에서 한정미로. 남성 기장에서 여성 부기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탱했던 모든 것을 덜어낸 그는 가짜로 무장한 진짜가 되어 다시 조종대를 잡는다.
‘여장 남자 코미디’를 둘러싼 걱정과 불안을 안고 이륙한 프로젝트 <파일럿>은 한국의 사회적 난기류 따위는 무섭지 않다는 듯 환상적인 줄타기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 여장 남자 파일럿이 모는 비행기 객석에 편안하게 탑승하기 위해서는 여성 상위 상태로 구현된 업계 판타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수칙이 있다. ‘여자가 되어 이득을 취한다’는 상상조차 불가한 한국에서 영화는 항공판 이갈리아의 딸들이라 불릴 법한 설정을 트로이의 목마처럼 심어둔다. “여자라는 이유로 저가항공사를 물려받은” 여성 유력자와 모든 면에서 훌륭한 먼치킨 여성 파일럿. 그리고 한정미. 남자 없는 세상에서 세 여자는 자신의 권력, 실력, 기지를 얼마든지 발휘하며 여성-능력 중심으로 재편된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한다. 희롱과 추태를 일삼는 남성들은 신속하게 몰락하거나 행위에 제지를 당하며 서사의 한구석으로 물러나 있다. 이러한 성차별에 근거한 단죄가 가능하다는 것 역시 판타지에 가까운 설정이다.
이렇듯 과감하게 세팅된 영화적 영공을 비행하는 <파일럿>은 관객의 웃음보를 정확하게 타격하며 맑고, 상쾌하고, 윤리적인 웃음을 선사한다. 상상 속의 여성성을 인위적으로 추구한 시스젠더의 기만도, 구조적 성차별이라는 현실에 침투하여 이득만 보고 떠나는 남성도 영화에는 없다. 생활밀착형 성차별은 지정성별 여성이 아니기에 가능한 남성적인 뻔뻔함,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낯 두꺼운 안하무인적 기개로 돌파한다. <82년생 김지영>에서 여성은 현실에는 어떤 희망도 없기에 영적 세계로 탈주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과는 달리 <파일럿>은 더욱 교묘해진 성차별에는 되레 알량하게 반격하라는 전략을 도입해 여자가 된 남자를 기어코 생존시킨다. ‘외모평가’라는 가장 명료한 도덕마저 첨예한 문제로 인식되는 한국에서 <파일럿>은 강단 있게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인다. 배우 조정석은 기초적인 소재로 급진적인 논의까지 이끌어내도록 설계된 각본을 택하면서 그 책임을 온전하게 달성한다. <파일럿>은 모범적인 영화가 될 것인가, 혹은 기념비적인 영화가 될 것인가의 기로에서 전자가 되기를 택한다. 주인공의 젠더 교란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더욱 과감한 아이디어들은 생략되어 있는데, 섹슈얼리티의 혼돈이나 위반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이 그중 하나다. 그럼에도 <파일럿>은 관객들이 오랫동안 희구해온 코미디라는 점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CLOSE-UP
‘남자 친구 있나?’ ‘결혼 계획은?’ 입사 면접에서 이런 질문이 들어오는 것 자체로도 황당하지만 어떤 기막힌 상황도 돌파할 준비가 된 대한민국의 여성 구직자라면 답변쯤은 준비해두는 것도 좋다. 여성 파일럿 윤슬기(이주명)와 한정미(조정석)의 대답을 참고해보자. “결혼 싫습니다. 완벽하게 싫습니다. 남자 친구 없습니다. 임신을 준비할 일도, 난자를 얼릴 계획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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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씨> 감독 시드니 폴락, 1982여장 남자 코미디가 서사적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기 어려운 탓을 40년 전 영화 <투씨>에 돌려본다. 직업 세계에서의 평판 하락 이후 복장 전환을 결심하는 남자들. 가발, 제모, 브래지어, 목소리 변조 등 성차를 활용한 코미디. <파일럿>은 성차별에 대응하는 여장 남자 서사의 원형을 수입해 한국 사회의 틀에 정확하게 이식하는 로컬라이징에 집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