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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패스트 라이브즈’, 어긋난 필연, 능동적 우연의 영겁으로 완성한 관계 일반의 이야기
임수연 2024-03-06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더 애틋하고 각별한 기억이 되는 것일까. 서울에 사는 12살 나영(그레타 리)은 가족과 토론토로 이민을 가게 된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이 꿈인 나영에게 한국은 너무 작은 나라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나영은 같은 반 친구이자 첫사랑인 해성(유태오)과 마지막 데이트를 한 후 헤어지고 서로의 소식도 알지 못한 채 각자 나이를 먹는다. 12년 후 나영은 연극 극작가를 꿈꾸며 ‘노라’라는 영어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꿈은 노벨문학상에서 퓰리처상으로 바뀌어 있다. 우연히 페이스북을 하다가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영은 먼저 해성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오랜만에 화상으로 첫사랑을 마주한다. 이제 막 군 제대한 해성은 대학에 복학하고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가려고 준비 중이다. 시차를 극복하며 연락을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감정이 싹튼다. 하지만 토론토를 떠나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달려야 하는 나영은 현실에 보다 집중하기 위해 잠시 연락을 멈추자고 말한다. 이후 나영은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만난 유대인 남자 아서(존 마가로)와, 해성은 상하이 야시장에서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로부터 또 12년 뒤, 나영은 극작가의 꿈을 이루고 아서와 부부가 됐다. 그의 꿈은 토니상을 받는 것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치며 여자 친구와 막 헤어진 해성은 나영을 만나기 위해 드디어 뉴욕으로 떠난다.

12살 때 토론토로 이민 간 한국계 캐나다인이자 뉴욕에서 극작가로 활동했던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현 남편과 어린 시절 연인 그리고 자신이 함께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오프닝 시퀀스의 구도는 그의 실제 경험담이며 영화의 출발점이 됐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해성과 나영 그리고 아서는 서로 ‘인연’으로 묶여 있다고 설명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든가 부부는 8천겁의 인연이 쌓인 관계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 역시 나영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자유의 여신상, 여행객의 캐리어,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의 혼재된 풍경이 ‘전생’과 ‘인연’과 ‘윤회’를 믿는 동양사상과 맞물리며 독특한 이국성을 만들어내는 점이 흥미롭다. 궁극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의 충돌은 시공간을 초월한 관계 일반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단지 문화와 언어와 성장 배경이 다른 세 남녀의 애정선이 어떻게 엇갈렸는지 시간순으로 되짚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선택과 의지와 운명을 조망하는 셀린 송 감독의 섬세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초반에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문어체적인 대사도 <패스트 라이브즈>가 가진 공간과 언어의 초월성을 부각하는 영화만의 매력적인 결로 승화된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 20년 전에 난 과거의 나를 네 곁에 두고 온 거야.”

12년의 시간이 두번 흐르고, 나영과 해성은 24년 만에 서로를 직접 마주한다. 가족도 더이상 쓰지 않는 ‘나영’이라는 이름은 해성의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과거의 나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들의 관계가 끝나지는 않는다. 무수한 생을 반복하며 인연이 쌓이기 때문에 과거 하나하나가 의미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나영의 대사.

CHECK POINT

<미나리> 감독 정이삭, 2020

한국계 이민자들이 주인공인 또 다른 영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1980년대 미국 아칸소로 이주한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그렸다. <미나리>가 시상식 레이스에서 주목받았던 것처럼 <패스트 라이브즈> 역시 미국감독조합상 신인감독상, 전미비평가협회상 작품상 등을 받으며 선전하고 있다. 오는 3월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각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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