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는 <울지마 톤즈>의 흥행과 함께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서품을 받은 직후 아시아 출신 사제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교구를 지원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태석 신부가 택한 수단은 북쪽의 아랍계와 남쪽의 원주민간의 충돌로 내전이 진행 중이었고,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고 있었다. 남수단에 위치한 톤즈 역시 전쟁과 가난으로 사람들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폐허와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이태석 신부는 자신의 남은 삶을 헌신했다. 사제이기 이전에 의사로서 아픈 사람들을 돌봤고,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성당보다 학교라고 믿으며 직접 건물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아이들에게 음악도 선물했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악기를 다루는 법을 가르쳤고, 생존만이 문제가 되었던 그곳에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아이들이 음악을 연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가 톤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건 8년 남짓의 시간뿐이었다. 휴가차 한국에 들러 건강검진을 받은 그는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눈을 감았다.
다큐멘터리 <이태석>은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나고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아 있는 그의 유산들에 대한 이야기다. 톤즈에서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이태석 신부를 기억한다. 그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자라서 또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국으로 유학 와서 의학을 공부하기도 한다. 그의 동료 신부 중 한명은 캄보디아에서 선교 봉사를 하며 아이들에게 플루트를 가르치는 수녀를 본 뒤에 이태석 신부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의 정신은 고통받는 이들과 계속해서 함께하기를 바라는 염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