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병수(권해효)가 미술하는 딸 정수(박미소)와 함께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 선생(이혜영)이 관리하는 건물에 찾아온다. 김 선생에게 정수를 소개하며, 그에게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할 요량이다. 테이블에서 서로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눈 뒤, 두 사람은 김 선생의 안내로 2층에 위치한 식당과 옥탑까지 건물 곳곳을 소개받는다. 셋은 이윽고 지하 작업실에서 와인을 곁들인 대화 자리를 갖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수가 영화사 대표의 연락을 받고 자리를 비우면서 김 선생과 정수만이 어색하게 남는다.
<탑>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미니멀하다는 인상을 가져온다면, 그 이유는 이야기가 오직 한 건물에서만 진행되기 때문이다. 지하부터 옥탑까지 층계로 이어진 건물과 그 주변에서 모든 대화와 상황이 이뤄진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의 전작 중 호텔 방에 홀로 묵는 한 남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강변호텔>이나, 한 카페를 중심으로 그곳을 오가는 인물들의 대화를 담은 <풀잎들>처럼 특정 장소가 중심이 되는 전작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중심 장소에서 이탈하는 순간이 그려지면서 그 바깥을 가늠할 수 있었던 데 반해 <탑>의 카메라는 건물 근처에 머물 뿐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엔 늘 중심인물이 존재해왔다. 이번 영화에서는 권해효 배우가 연기한 병수가 중심에 놓이나, 전과 같은 의미의 중심인물처럼 보이진 않는다. 차라리 이 말 없는 건물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하나의 공간에서 이뤄짐에도 폐쇄적이거나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건물이 폐쇄적으로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굽고, 기타를 치는 온갖 일들이 일어난다. 닫히거나 열린 문 혹은 창문으로 보이는 심상한 풍경은 감독의 최근 작품에서 보여준 얼룩이나 초점이 맞지 않는 이미지처럼 너무 일상적이어서 시선을 끄는 데가 있다.
장소를 기점으로 숏이 분리되지 않은 채 시간의 점프를 그린다든지, 보이스 오버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쓰이는 등의 형식적인 시도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이 생경한 느낌을 주면서도 어렵다거나 난해하다고 느끼게 하기보다는 그의 영화에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친밀한 신호처럼 여겨진다. 감독 병수의 팬이라는 선희(송선미)의 ‘깔깔거리면서 구르면서 본다’라는 감상평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풀어주는 동시에 김 선생처럼 정색하면서 볼 때 마주하게 되는 이상하게 섬뜩한 순간이 여전히 존재한다. 어쩌면 이런 두 가지 반응이 공존하는 소통의 장소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일 것이다.
"밖이 더 진짜일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정수와 김 선생의 대화 장면에서 김 선생의 말. 어떤 인물을 두고 안과 밖이 다르다고 할 때, 흔히 안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진짜고, 밖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꾸며진 것으로 생각한다. 이 대사는 이러한 선입견에 제동을 건다.
CHECK POINT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기생충>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던 하나의 집과 <탑>의 건물을 함께 생각해보자. 각각의 집을 통해 미니멀리즘에 내재한 맥시멀리즘을, 미니멀리즘 안의 미니멀리즘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