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민우 <삼별초>

소설, 만화, 웹툰 등 원작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고들 한다. 경쟁자 수도 많아졌고, 영화화 판권 가격도 껑충 뛰어올랐다. 겨우 원작을 확보하면 시나리오 개발 비용과 시간을 또 투입해야 한다.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하더라도 투자를 받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직접 웹툰 같은 원천 콘텐츠를 제작하는 바람이 CJ E&M 콘텐츠 개발실로부터 불고 있다. 그들이 웹툰을 직접 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시 마포구가 땅밑으로 푹 꺼졌다. 도시를 단숨에 집어삼킨 싱크홀 때문이다. 얼마 전 2부 연재가 시작된 웹툰 <심연의 하늘>(스토리 윤인완/그림 김선희/제작 Ylab)은 무시무시한 재난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주인공 하늘의 생존 스토리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처지와 지옥과 다름없이 묘사된 캄캄한 서울은 독자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보통 웹툰과 다른 점이 있다. CJ E&M 콘텐츠 개발실(이하 CJ 콘텐츠 개발실)이 네이버 웹툰에 연재되기 전에 투자했다는 사실이다. 영상화 판권 구매가 아니다. 영상화를 전제로 한 웹툰 제작이 목적인 투자였다. 작가가 네이버나 다음 같은 웹툰 플랫폼과 직접 연재 계약을 맺는 보통 웹툰과 다른 제작방식이다. 비용이나 제작비 투입 시기는 제각각이지만 CJ 콘텐츠 개발실이 창작자와 직접 계약해 제작을 진행하고 있는 웹툰과 출판만화가 서른편 가까이 된다(이중 15편에 대한 소개는 아래 박스 참조).

개선된 시스템을 통한 완성도 높은 작품

CJ 콘텐츠 개발실은 원천 콘텐츠를 직접 기획/개발하거나 소설, 만화, 웹툰 같은 원작을 구매해 회사 내 영화 부문과 드라마 부문에 영상화를 제안하는 팀이다. 재능 있는 신인감독을 발굴해 <소녀>(감독 최진성), <조난자들>(감독 노영석), <거인>(감독 김태용) 같은 저예산영화를 투자/제작했다. 버터플라이 프로젝트와 신인작가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시나리오 30여편을 기획/개발해오고 있다. 또, 지난 4월 CJ E&M과 베트남 국영 방송사 VTV가 공동제작하는 36부작 드라마 <오늘도 청춘>(가제)도 이 팀에서 기획/개발한 프로젝트다. CJ 콘텐츠 개발실이 만화와 웹툰 제작 사업에 뛰어든 건 2011년 말쯤이다. 김영욱 팀장은 “네이버나 다음에 연재하고 있는 웹툰의 영상화 판권을 구매해 직접 영화 시나리오로 개발하거나 회사 내 영화 부문이나 드라마 부문에 개발을 제안하다보니 영상화할 만한 웹툰이나 만화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상화를 전제로 한 웹툰, 만화, 그래픽 노블을 직접 기획해 개발하면 영상화 가능성이 더욱 클 것 같았다”고 만화, 웹툰 제작 사업을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앞서 김 팀장이 짧게 언급한 것처럼 주로 소설, 웹툰, 만화 등 인기 있는 원천 콘텐츠의 영상화 판권을 구매해 영화 시나리오로 개발했던 기존의 충무로 방식과 달리 CJ의 웹툰, 만화 제작 사업은 프로듀서가 웹툰, 만화 작가와 함께 영상화를 전제로 한 웹툰과 출판만화 그리고 그래픽 노블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건 최근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만화, 웹툰 시장과도 관련 있다. CJ 콘텐츠 개발실 원작 업무 담당 권재현 부장은 “웹툰과 만화 시장을 지켜보니 좋은 원작이 안 나오는 이유가 있더라. 만화 산업은 거의 무너진 상태고, 웹툰산업은 프로듀싱 기능이 사라졌다. 과거 출판만화 업계에 있었던 최소한의 편집 기능이 사라졌다”라며 “출판만화는 무너졌고,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웹툰은 산업으로서 아직 성숙되지 못한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좋은 작품들이 원하는 숫자만큼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참여하면 기존의 출판만화나 웹툰과는 또 다른 방식의 개선된 시스템 안에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유혜선 < Anti-Anti-Angel >

원천 콘텐츠 축적과 인지도 확보

영화 제작방식이 그렇듯이 CJ 콘텐츠 개발실의 만화, 웹툰 제작 방식은 다양하다. 작가가 자신이 가진 아이템을 들고 찾아와 기획/개발을 제안하는 경우도 있고,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역으로 CJ 콘텐츠 개발실이 직접 개발한 아이템을 가지고 작가를 찾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형민우, 김태관, 박소희, 전극진 등 인기 출판만화 작가들을 끌어모았다. 제작 계약을 맺으면 작가 아이템이든 CJ 아이템이든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프로듀서와 만화 작가는 전체 스토리, 아트 컨셉, 주요 캐릭터 등 작품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은 CJ가 부담한다. 작품의 규모와 작가의 경력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작가 개런티는 웹툰 연재료에 비해 안정적인 수준이라고 한다. CJ 콘텐츠 개발실과 함께 웹툰 <삼별초>(그래픽 노블로도 출판될 계획이다)를 제작하고 있는 형민우 작가는 “일단 개런티가 안정적이다. 프로듀서가 작품에 사사건건 개입하지 않고, 최초에 합의한 아이디어가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휘둘리지 않게 방향을 잘 잡아준다”고 CJ의 프로듀싱 시스템에 만족해했다. CJ가 제작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만화 사업권을 가지되 작가와 수익을 배분(Revenue Sharing)한다. 수익 배분율은 작가와 제작사에 굉장히 우호적인 조건이라고 한다. 영상화 판권은 작가에게 있고, CJ엔 영상화 판권 우선협상권이 주어진다. 이같은 구조 안에서 제작되는 웹툰이 사업적으로 의미가 있다면 제작비 회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근 <심연의 하늘> 역시 연재료, 광고비 등 여러 수익을 합쳐 제작비를 회수했다. 김영욱 팀장은 “콘텐츠 회사는 웹툰, 만화 같은 원작을 영상화할 경우 원천 소스(IP)를 축적하는 게 중요한데, 제작비가 회수되면서 원천 소스를 축적할 수 있다는 게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만화, 웹툰 제작 사업은 원천 콘텐츠를 축적할 수 있는 장점만 있는 게 아니다. 웹툰이나 만화로 먼저 대중과 만나면 사전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다. JK필름 장진승 이사는 “웹툰으로 먼저 선보이면 그렇지 않은 작품보다 사전 마케팅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전했다. 활자만으로 된 영화 시나리오보다 투자자들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CJ 권재현 부장은 “콘텐츠 개발실이 제작하고 있는 웹툰 <액션 아이돌>은 노래와 춤이 아닌 액션과 패션으로 승부를 보는 가까운 미래의 아이돌 이야기인데, 아시아 각국의 아이돌 그룹 멤버들을 캐스팅해 글로벌 프로젝트로 만드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시나리오로 개발되면 막연한 이야기라 그림으로 먼저 보여주는 게 더욱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김태관, 김동훈 <액션 아이돌>

상호존중이 중요한 웹툰 제작

사실 이같은 시도가 충무로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후반작업이 한창인 <마담 뺑덕>(감독 임필성, 출연 정우성/이솜)을 제작한 영화사 동물의 왕국 임성원 대표는 오래전부터 웹툰과 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그는 만화 작가 25명과 함께 원천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그가 제작했던 다음 연재 웹툰 <라스트>는 처음에는 영화 시나리오로 개발됐다가 소재가 만화 매체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 웹툰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역시 그가 제작한 웹툰 <일진의 크기>는 현재 하루 조회수 800만건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임성원 대표는 “만화나 웹툰 원작을 구매해 영화 시나리오로 개발한다고 해서 플롯 완성도가 높거나 개발 기간이 짧아지진 않더라. 그럴 바에는 원천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면 영화 시나리오 개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줄여나갈 수 있다”고 원천 콘텐츠를 제작하는 이유를 밝혔다. 그는 웹툰 15편을 내년 라인업으로 확보했고, 지난 5년 동안 축적된 웹툰 원천 콘텐츠 기획, 제작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8월 말 웹툰 모바일 앱 AP(Animal Planet) 코믹스를 론칭할 계획이다(AP 코믹스 웹사이트는 10월에 오픈 예정). 문와쳐 윤창업 대표 역시 다음에 연재됐던 인기 웹툰 <마노’s 패밀리>를 제작한 바 있다.

물론 웹툰, 만화 제작 사업이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제작 비용만큼이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임성원 대표는 “영화에 비해 웹툰이 제작 기간이 짧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못지않은 정성을 들여야 한다. 특히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로 작가를 대하면 안 된다. 상호존중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회사이기에 간섭이 심할 거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형민우 작가는 “<삼별초>를 흑백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먼저 CJ에 제안하기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CJ가 먼저 그 제안을 해줘서 믿고 함께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영화든 웹툰이든 출판만화든 투자자와 창작자가 서로 신뢰할 수 있을 때 완성도 높은 콘텐츠가 탄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CJ 콘텐츠 개발실의 만화, 웹툰 제작 사업을 두고 웹툰 업계는 “좋은 원작이 많이 나와 영상화가 될 수 있다면 산업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일단 기대하는 반응이다. 다음 만화속세상 박정서 편집장은 “작가들의 크리에이티브와 CJ의 자금, 프로듀싱이 결합해 더 좋은 작가, 더 다양한 프로젝트가 나올 것이고, 그것은 만화계 전체에도 좋은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레진코믹스 김창민 CP(Chief Producer) 역시 “만화, 웹툰 시장이 아직 산업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CJ의 투자는 만화 시장이 활성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 같다. 만화 산업이 활성화된다면 창작자들도 혜택을 받을 것이고, 영화나 드라마, 공연 같은 다른 매체에도 좋은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CJ 콘텐츠 개발실의 웹툰, 만화 사업이 원천 소스 확보가 중요한 영화계와 산업화와 매체 확장이 절실한 만화 업계 양쪽에 어떤 바람을 불러일으킬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