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되기까지
<박봉곤 가출사건>의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진 장항준(33) 감독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남들 흉내까지 내면서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내면 실제 있었던 일인 줄 알고 다들 깜쪽같이 속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훈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영화포스터만 보고 보지도 않은 영화스토리를 읊어대면 친구들은 그걸 진짜로 믿곤 했다. 서울예대 연극과에서 그는 졸업 전까지 학교 도서관에 있는 시나리오, 희곡 2천여편을 전부 읽었다. 극작에 흥미를 느껴 영화과 수업도 듣고 틈틈이 습작을 했다. 졸업할 무렵 영화현장을 경험하고 싶어 찾아간 곳이 <비상구가 없다>를 제작중이던 영화사 모가드 코리아. 이때 영화세상 대표인 안동규씨와 인연을 맺었고 연출부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연출부 생활을 계속하기엔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다. 방송사 FD로 시작한 지 석달 만에 방송작가로 발탁됐고 <깜짝 비디오쇼> <좋은 친구들> <천일야화> 등 프로그램 대본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안동규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가출한 아내를 찾아나서는 남자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데 시나리오를 쓸 생각이 있냐는. <박봉곤 가출사건>이 그렇게 나온 작품. 그뒤 2년간 매달린 시나리오가 <뛰다가 생각이 나면>이지만 끝내 영화화하지 못했다. 경제적 어려움이 심했던 나날이었고 작가로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걸 절감한 때였다. 데뷔작 <불타는 우리집>은 지난해 5월부터 쓴 시나리오. <뛰다가 생각이 나면>이 무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직접 연출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해 연출부를 구성했고 제작사도 직접 선택했다. 연출수업을 착실히 받은 건 아니지만 학창 시절부터 갈고 닦은 극작과 연기훈련이 연출에 대한 자신감을 준 셈이다.
▒어떤 영화를 만들것인가
장항준 감독은 좋아하는 영화로 <대부2> <정복자 펠레> <일 포스티노> 등을 꼽는다.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데뷔작 <박봉곤 가출사건>과 감독데뷔작 <불타는 우리집>의 공통점도 그런 것이다. 그는 두 영화 모두 코미디라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말한다. 무거운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다보니 코미디 문법을 택한 것일 뿐이다. <불타는 우리집>의 출발점은 우디 앨런의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다. 이 영화에는 출옥한 전과자 팀 로스가 어느 중산층 가정에 들어와 소동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불타는 우리집>은 이런 상황을 영화 전체로 확대시킨 모양새다. 평온해 보이는 가정과 험악한 전과자 사이에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코믹하게 그릴 <불타는 우리집>은 결국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따뜻한 결론을 준비한다. 전과자인 주인공을 얼마나 인간미 넘치게 묘사할지, 엉뚱한 상황전개가 얼마나 자연스런 웃음을 이끌어낼지가 관건일 것이다.
▒<불타는 우리집>은 어떤 영화
주인공은 절도전과 9범에다 바람피우는 아내를 살해한 죄로 6년째 복역중인 팔강. 그는 새로 생긴 전과자 재활프로그램의 대상자가 된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가석방이 달갑지 않은 팔강이지만 새로운 재활프로그램이 하루빨리 없어지길 바라는 교도소에선 밖에 나가서 말썽피울 게 뻔한 그를 택한다. 재활프로그램은 가석방 전 단계로 전과자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모범가정에서 한달간 생활하게 하는 것. 팔강은 가정문제연구소를 운영하는 중석, 죽희 부부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겉보기에 매우 평화로운 중석, 죽희 부부의 가정. 고등학교 다니는 구근, 매화 남매가 있고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할아버지가 있는 이 집은 알고보면 가족 각자가 제멋대로다. 남들 눈에 모범가정으로 비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죽희, 아내 몰래 젊은 여자를 만나는 중석, 매일 근육키우는 일에 열심이지만 학교에선 맞고 다니는 구근, 선생님 앞에선 수줍은 여학생처럼 행동하지만 친구들한테는 거침없이 욕을 내뱉는 매화. 이들 넷은 험상궂고 안하무인인 팔강의 태도에 기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팔강과 가족 사이는 조금씩 변화한다.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