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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영광, 땅에는 오스카 트로피, 79회 아카데미상 경향 미리 보기

대형 서사극도 없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도 없다. 2월25일 LA 코닥극장에서 판가름날 79회 아카데미상은 그간 꽁꽁 닫아두었던 보수의 문을 반쯤 열었다. 작품상 후보작들은 미국 국경을 벗어나 글로벌 바람을 몰고 왔고, 주·조연상 부문에서는 영국 배우들과 흑인 배우들의 행보가 두드러진다. 그밖에도 궁금한 것은 많다. 마틴 스코시즈는 오랜 기다림을 보상받을 것인가, 메릴 스트립은 세 번째 트로피를 가져갈 수 있을까 등등. 그 결과를 기다리기에 앞서, 올해 두드러지는 아카데미상 경향을 미리 짚어봤다.

1. 글로벌 바람이 아카데미에도 불까?

작품상 후보: <바벨> <디파티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미스 리틀 선샤인> <더 퀸>

아카데미가 비싼 서사극을 선호한다는 징크스는 이미 깨졌다. 후보작 리스트를 보라. 전쟁영화(<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장르영화(<디파티드>), 저예산 블랙코미디(<미스 리틀 선샤인>)까지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다. 굳이 특징을 꼽자면 ‘다양화, 글로벌화’라고 말할 수 있을 듯. 세 대륙을 교차하며 테러리즘의 불안을 그린 <바벨>이나 영국 왕실의 이면을 담은 <더 퀸>, 거의 모든 대사가 일본어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등 미국 국경을 벗어난 작품들도 많다. 올해 아카데미는 지금껏 고수해온 취향을 버린 대신 비평가들의 반응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냄새가 난다. 5편 모두 뉴욕비평가협회나 전미비평가협회 등 이미 다른 시상식에서 수상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벨>은 아카데미상의 바로미터인 골든글로브에서 작품상을 수상해 가장 수상이 유력한 작품이다. 지난해 예상을 깨고 <크래쉬>가 작품상을 가져간 걸 감안해볼 때, 선댄스용에 가까운 800만달러짜리 저예산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이 수상하지 말란 법도 없다.

2. 마틴 스코시즈는 드디어 웃을 수 있을까?

감독상 후보: <바벨>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디파티드>의 마틴 스코시즈,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더 퀸>의 스티븐 프리어스, <플라이트 93>의 폴 그린그래스

올해 아카데미는 ‘마틴 스코시즈의 최후의 유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5번 후보에 올려놓고 5번 모두 떨어뜨린 전력이 있으니, 이번에는 ‘짜고 치는 고스톱’일지언정 반드시 그에게 감독상을 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미국감독협회가 주는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터라, 어느 정도 확실한 지름길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다(지난 6년간 미국감독협회에서 수상한 4명의 감독이 모두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지난해 그를 물먹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떡 버티고 있는데다, 기예르모 델 토로, 알폰소 쿠아론과 함께 ‘멕시코 3인방’으로 주목받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위협도 만만찮다. 게다가 영국에서 가열차게 응원을 보내는 영국 출신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와 폴 그린그래스도 무시할 수 없으니, 미국인이라는 치졸한 어드밴티지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 게 좋겠다.

3. 세 번째 흑인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나올까?

남우주연상 후보: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하프 넬슨>의 라이언 고슬링, <비너스>의 피터 오툴, <행복을 찾아서>의 윌 스미스, <라스트 킹>의 포레스트 휘태커

올해 아카데미는 ‘블랙 오스카’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주·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흑인 배우만도 5명. 수적인 양상만 두드러지는 게 아니라, 수상 가능성도 높다. 특히 처음으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포레스트 휘태커는 상당히 유력한 후보다. <라스트 킹>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1970년대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으로, 워낙 파워풀한 캐릭터라 연기력이 한층 더 돋보인다는 이점이 있다. 또 다른 흑인배우 윌 스미스는 <행복을 찾아서>에서 친아들과 함께 출연해 진한 부성애를 보여줬다. 휴머니즘에 약한 아카데미위원회의 마음을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에비에이터> 이후 두 번째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이미 공로상을 수상한 노장 피터 오툴도 무시할 수 없는 후보다. 그러나 의외로 캐나다 출신의 젊은 배우 라이언 고슬링이 복병이 될 수도 있다. 비평가들에게 ‘보석 같은 영화’로 평가받은 <하프 넬슨>에서, 그는 마약중독에 빠진 중학교 교사를 연기했다.

4. 실버 파워는 발휘될 수 있을까?

여우주연상 후보: <귀향>의 페넬로페 크루즈, <노트 온 스캔들>의 주디 덴치, <더 퀸>의 헬렌 미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 <리틀 칠드런>의 케이트 윈슬럿

<LA타임스> 칼럼니스트 톰 오닐의 분석에 따르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대부분 40대 배우들에게, 여우주연상은 20대 후반에서 30대 배우들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올해는 이런 경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30대 초반의 페넬로페 크루즈와 케이트 윈슬럿을 제외하면, 메릴 스트립(57살), 헬렌 미렌(61살), 주디 덴치(72살) 모두 연령대가 높은 배우들이다. 연기력에 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명배우들. 메릴 스트립이 세 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갈 수도 있고, 미묘한 심리 스릴러 <노트 온 스캔들>의 주디 덴치가 맏언니(?)답게 수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에 떠도는 무성한 소문들을 수집해보면, 헬렌 미렌의 수상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헬렌 미렌은 <더 퀸>에서 한 나라의 여왕인 동시에 한 여자인 엘리자베스 2세를 능수능란하게 연기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녀의 명연기는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또 그녀는 1995년 <조지왕의 광기>와 2002년 <고스포드 파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전력이 있다.

5. 에디 머피는 연기파 배우로 거듭날까?

남우조연상 후보: <미스 리틀 선샤인>의 앨런 아킨, <리틀 칠드런>의 재키 얼 할리,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자이몬 혼수, <드림걸즈>의 에디 머피, <디파티드>의 마크 월버그

섣부른 추측조차 거의 없어, 좀처럼 수상 가능성을 가리기 어려운 부문이다. 우선 <디파티드>에서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던 디그냄 형사 역의 마크 월버그. 그는 잭 니콜슨을 제치고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눈길을 끌었으며,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광산 노역자로 출연한 자이몬 혼수와 <미스 리틀 선샤인>의 유쾌한 할아버지 앨런 아킨이 나란히 경쟁자 대열에 합류했다. 1993년 자취를 감췄다가 13년 만에 컴백한 재키 얼 할리의 행보도 흥미롭다. 그는 <리틀 칠드런>에서 소아성애도착자로 출연해, 지난해 비평가들이 주는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드림걸즈>에서 슈퍼스타 역을 맡은 에디 머피는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수상에 이어, 오스카 트로피를 노리고 있다. 만약 그가 수상에 성공한다면, 코미디 배우에서 연기파 배우로 널리 인정받게 되는 셈이다.

6. 10살짜리 소녀가 트로피를 가져갈까?

여우조연상 후보: <바벨>의 아드리아나 바라자, <노트 온 스캔들>의 케이트 블란쳇, <미스 리틀 선샤인>의 아비게일 브레슬린, <드림걸즈>의 제니퍼 허드슨, <바벨>의 기쿠치 린코

올해 여우주연상 후보 선정이 명배우들에게 예우를 갖춘 것이라면, 여우조연상은 꽤 실험적인 선택을 감행했다. 2004년 <에비에이터>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던 케이트 블란쳇을 제외하면 모두 경력이 짧은 낯선 배우들. <바벨>에서 멕시코인 유모로 나온 아드리아나 바라자는 알려진 대표작이 별로 없으며, 제니퍼 허드슨은 리얼리티 쇼 <아메리칸 아이돌>로 급부상해 <드림걸즈>로 유명해진 새내기다. 일본 배우로서는 50여년 만에 아카데미에 진출해 자국민의 환호를 받는 기쿠치 린코도 마찬가지. 가장 흥미로운 건 10살짜리 배우 아비게일 브레슬린이다. 브레슬린은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미인대회에 출전하려는 소아비만 어린이로 출연해, 괴팍한 가족들의 구심점 구실을 천연덕스럽게 해냈다. 이래저래 올해 여우조연상은 누가 수상하더라도 그 결과가 즐거울 듯하다.

올해의 안주인, 앨런 드제너러스

지상 최대의 쇼를 책임질 새로운 안주인이 나타났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출발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진행하는 앨런 드제너러스. 오스카에 관해서는 방송 중계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녀 특유의 생동감있는 말솜씨와 에너지 덕분에 발탁됐다는 후문이다. 명사회자 밥 호프, 빌리 크리스털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오른 드제너러스, 부디 데이비드 레터맨 같은 경거망동은 하지 않기를.

올해의 공로상, 엔니오 모리코네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기립박수를! 5번이나 후보에 올랐으나 한번도 수상하지 못한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드디어 아카데미가 공로상으로 화답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엔니오 모리코네는 45년간 300편 이상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전설적인 인물. 78살의 이 거장이 무대에 등장할 때, 오케스트라는 어떤 음악을 연주할까? 혹시 <황야의 무법자>의 휘파람 소리?

샤론 스톤, 불명예의 전당에

회춘은 적당히. 1992년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은 우릴 후끈 달아오르게 했으나, 2006년 속편으로 돌아온 샤론 스톤은 지리산 등반에 나선 80대 할아버지처럼 안쓰러웠다. 한때 <카지노>로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샤론 스톤, 올해는 최악의 영화를 선정하는 골든 라즈베리상 최다 부문 후보(7개: 작품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등)에 올라 망신살만 단단히 뻗쳤다.

재치있는 수상소감을 부탁해

“이제 그만, 너의 시간은 끝났어. 지루해. 캐서린 제타 존스를 봐, 코를 골고 있잖아. … 너희 집 잉꼬에게까지 감사할 필요는 없어” 2004년 시상식 때 기가 막힌 운율로 긴 수상소감에 일침을 가했던 잭 블랙과 윌 페럴(사진)의 듀엣송을 기억하는가? 지루한 수상소감은 교장선생님의 잔소리보다 더 끔찍한 법. 올해 시상식 프로듀서를 맡은 로라 지스킨은 “만약 수상소감이 적힌 종이를 들고 무대에 오른다면, 종이가 불에 타버리는 걸 보게 될 것”이라며 짧고 재미있는 수상소감을 준비할 것을 강조했다. 수상자들이 부디 제한시간이 45초라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그보다 짧으면 더 좋고.

좋은 사례: 객석에 있는 청각장애인 부모님께 수화로 감동적인 말을 전달한 루이스 플레처, 백마디 말보다 한번의 푸시업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한 잭 팰런스, 객석 사이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기쁨을 표시한 귀여운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시상하러 나온 할리 베리에게 열렬한 키스를 보내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든 에이드리언 브로디 등. 나쁜 사례: 무려 5분30초 동안이나 떠들어댄 그리어 가슨, 진지한 정치적 견해를 너무나 진지하게 말해 쇼에 찬물을 끼얹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I Love You”만 14번이나 반복하다 쫓겨날 뻔한 쿠바 구딩 주니어, 오만방자한 캐치프레이즈 “I’m King of the World”를 낳은 장본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