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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떠나는 길 [1]
오정연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6-05-03

지난 4월11일 밤. 신상옥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멜로와 사극, 코미디와 무협, 전쟁물과 심지어 서부극과 뮤지컬까지 섭렵하며 오로지 관객만을 생각했던 그는 한국의 하워드 혹스라 불려 마땅한 장인이었지만, 기자가 직접 보았던 그의 영화는 <성춘향>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두편뿐이었다. 생전의 고인을 인터뷰하는 영광 또한 누린 바 없다. 70년대생 영화기자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는 신상옥 감독이 주름잡았던 한국영화의 전성기와 그 시절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너무 늦은 취재로 가능한 방식은 그리 많지 않다. 빈소와 장지를 찾은 지인들에게,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청했다. 지나친 무지와 게으름이 못내 부끄럽지만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것은 진심어린 관심뿐이었다.

장지에서 돌아와 신상옥 감독의 일대기가 한·미 합작으로 스크린에 옮겨진다는 뉴스를 접했다. 한국영화·현대사의 축소판과도 같았던 고인의 인생이었으니 어떤 상업영화의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음날 밤에는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지옥화>와 <겨울이야기>, 고인의 초기작과 유작을 연달아 감상했다. 완성도와 장르의 부침이 심했던 그의 필모그래피의 처음과 끝을 접한 셈이나, 그의 작품세계는 여전히 와닿지 않는다. 일단은, 여기까지다. 이것은 한동안 부재했던, 그러나 엄격하고 화려했던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향한 우리의 배웅이요, 거장을 떠나보내는 길에 내딛은 첫걸음이다.

“한류스타의 원조가 그 양반이야”

4월12일 수요일, 빈소 첫쨋날

서울대학교병원 대학로 방면 입구에서 장례식장까지가 이렇게 멀었던가. 고백하건대 무식을 무기로 취재에 나선 기자가 그 길을 올라가는 동안, 영화계의 큰 별을 잃었다는 슬픔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빈소 입구부터 빽빽하게 늘어선 화환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각종 영화 관련 협회와 영화사, 영화제의 이름이 눈에 띈다. 거장의 마지막 발걸음을 지키는 묵직한 배웅인가.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황급히 머릿속에 입력한 신상옥 감독의 약력과 필모그래피는 아득하기만 하다.

한국영화의 시작과 전성기, 남한과 북한, 홍콩과 미국을 넘나들며 이어지던 그의 작업은 52년 동안 200여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80편 가까운 영화를 연출한 결과를 낳았다. 며칠에 걸쳐 빈소에서 만난 신상옥 감독의 지인들 대부분은, 약속이나 한 듯 그를 둘러싼 장대한 스케일로 말문을 연다. 대기업도 공채를 실시하지 않던 시절, 몇백여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조감독을 공개 채용했다는 신필름의 위용은 백발의 원로감독들에게 아직도 생생하다. 소품실과 의상실, 녹음실과 세트장에 이르는 규모보다 인상적인 것은 영화판의 모두가 힘겹던 시절 유일하게 월급제를 실시했던 시스템. 장형일 PD(<야인시대> <장길산>)는 “다른 곳에선 작품당 계약을 했기 때문에 영화를 찍고 있을 때는 술 퍼마시고 놀다가, 촬영이 없을 때는 쫄쫄 굶기 일쑤였지. 근데 신필름에선 월급을 받으니까 생활이 안정되는 거야”라며 제도가 만든 생활의 변화를 설명한다.

<로맨스 그레이> <빨간 마후라> 등의 연출부로 감독의 꿈을 키웠던 장형일 PD는 신상옥 감독의 전성기를 함께한 조감독 중 한명이다.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의 조감독으로, 신상옥 조감독 1세대로 꼽히는 임원식 감독(<나는 매국노>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등)은 “한류스타의 원조가 바로 그 양반이야. 홍콩영화가 미처 발달하기 전인 1960년대에는 신 감독 영화를 수입해서는 숏 바이 숏으로 복사해서 영화를 만들 정도였어”라며 선배의 화려한 전성기를 돌아본다. <성춘향>(1961)의 전설적인 흥행도 빼놓을 수 없다. 명보극장에서 단관개봉하여 서울에서만 4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피부로 와닿지 않던 터에, 최은희의 친동생으로 신상옥 감독의 제작부, 촬영부, 연출부를 거쳐 감독 데뷔한 최경옥 감독(<흑도적> <눈물의 여인> 등)은 열번도 넘게 <성춘향>을 본 끝에 마지막 한번은 공짜로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할머니의 일화를 들려준다. ‘<왕의 남자> 폐인’과 겨뤄도 손색이 없는, ‘<성춘향> 폐인’이다.

“불가능이 없는 분 앞에서 안 된다는 말은 안 통해”

4월13일 목요일, 빈소 둘쨋날

이틀째 빈소를 찾으니,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띈다. 모두 연출부로, 배우로, 신상옥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이들이다. 혈기왕성한 젊음으로 현장에서 만났던 그들이 50년 만에 해후하고, 반세기 전 촬영장에서 벌어졌던 사소한 에피소드를 추억하는 시간. 그저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던 인간 신상옥에 대한 전설 같은 기억들이 꾸역꾸역 흘러나온다.

최경옥 감독은 시장에서 버린 무청을 절여 만든 주먹밥으로 스탭들의 식사를 해결하던 신상옥 감독의 초기 현장 분위기를 전한다. 신상옥 감독은 작은 조명기만으로 야간 세트를 밝히려다보니 그림자가 사방으로 드리우는 건 어쩔 수 없건만 그림자를 없애기 전에는 촬영에 들어가지 않았다. 큰 조명기를 구하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곤 했던 기세는,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촬영이 지연되어 촬영감독이 작업을 거부하자 직접 카메라를 든 것으로도 증명된다. 당시 기술스탭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어서, 촬영감독은 “마누라는 같이 봐도 카메라는 같이 못 들여다본다”며 다른 스탭이 카메라 만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조명감독은 노출계를 신기하게 여기는 제작부 스탭에게 “배우의 감정을 재는 기계”라며 사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신상옥 감독은 처남에게 필름 로딩법이며 노출계 사용법, 조명법을 가르쳐서 촬영부로 키운 뒤 촬영을 재개했다. 이후에도 신상옥 감독은 연출작 대부분을 직접 촬영하다시피 했기에 크레딧에 촬영감독으로 올린 이들 대부분은 촬영부 퍼스트에 불과했다.

제작과 연출, 촬영, 편집을 직접 했던 신상옥 감독은 연출부 역시 영화제작의 전 분야를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신필름에 입사한 연출부는 소품과 의상실, 현장과 편집실까지 로테이션을 돌았다. 선배의 부고를 듣고 미국에서 귀국한 이경태 감독(<포상금> <별들의 고향3> 등)은 공채 형식으로 신필름에 입사한 케이스. 당시 영화지망생들에게 신필름 자체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신상옥 감독의 연출부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였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완벽주의자 신상옥 감독에게 연출부로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일반적으로 연출부 막내의 몫인 슬레이트를 치는 것 하나도 세상없는 도전과제였다. 타이밍과 속도, 각도를 맞추어 프레임 안에 슬레이트를 집어넣는 것은 그의 연출부로 인정받는 통과의례였고, 이를 무사히 거치고 나면 왠지 모를 자부심에 며칠씩 기분이 좋았다. 연기지도부터 소품을 챙기는 것까지 연출부의 일은 끝이 없었지만, 그가 앵글파인더를 들여다보는 동안 신상옥 감독의 허리띠를 붙들고 쫓아다니는 것 역시 중요하다. 고급 양복에 구두를 차려 입고도 촬영만 들어가면 개울물, 논두렁으로 뛰어들기 일쑤인지라, 바로 뒤에 낭떠러지가 있어도 성큼성큼 뒷걸음질을 쳤기 때문이다. 촬영이 끝나면 고난의 편집이 시작된다. 별다른 고민없이 손으로 필름을 찢어 붙이는 신상옥 감독은 자른 필름을 편집실 사방으로 던져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뒤늦게 버린 필름을 다시 찾으라는 명령에 온 연출부가 수북이 쌓인 필름을 뒤집어엎는 난장판은 당연한 귀결. 장형일 PD는 밤새도록 한컷을 찾았더니 다음날 아침 “생각해보니 필요없더라”며 고개를 돌리던 선배를 떠올리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신상옥 감독이 스탭이나 후배들을 자상하게 챙겨주었다는 일화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을 향한 세심한 배려가 유독 부족했던 신상옥에게는 부인이자 든든한 동료였던 배우 최은희가 있었다. 1959년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으로 신상옥 감독의 전속배우로 발탁되어 오랜 기간 작품을 함께해온 남궁원(<빨간 마후라> <대폭군> 등)은 신상옥 감독과의 첫 만남에 동행했던 선배 최은희가 눈에 선하다. 촬영까지 겸하느라 현장에서 연기연출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신상옥 감독 옆에서 후배들의 연기를 지도하거나 연기 교사를 붙여주는 것은 최은희의 몫이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이제 궁금해지는 것은, 서슬퍼런 신상옥 감독과 그의 자상한 조력자가 감독과 배우로 대면하는 현장에 존재했을 묘한 긴장감의 실체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장에서 둘이 부부라는 걸 의식할 정도로 신 감독이 최 여사를 특별대우한 적은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최은희가 허장강과 함께 <무정>(1962)을 찍을 무렵, NG가 거듭될수록 최은희의 치마가 자꾸만 내려가는 바람에 차마 나서서 말도 못하고 조마조마했던 스탭들이 당시를 떠올리며 웃는다. 최은희의 조카이자 <무정>의 스크립터였던 장희진씨는 “요즘에야 촬영장에서 여배우들이 노출하는 게 예사라지만 그때야 어디 그런가요”라며 거든다. 문제의 치마는 OK 사인과 함께 미끄러져 내렸으나 신상옥 감독 자신은 그런 상황에서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쯤되면 “언제나 최은희씨 위주로 영화를 찍으니, 같은 주연이어도 우리는 늘 뒤통수만 나오고 늘 뒤로 밀리는 기분이었지. 직접 말은 못하고 촬영감독에게 화를 내거나, 중요한 장면에서 아예 카메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연기를 했다니까”라는 배우 최지희(<자매의 화원> <해녀> 등)의 푸념을 들어도, 부인을 향한 특별대우가 아니라 톱스타의 영향력을 고려한 선택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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