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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작소 청년의 10년
2001-07-27

영화의 꿈은 계속 된다, 청년의 이름으로

그것은 ‘미약한 시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첫 작품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매캐한 최루탄을 뚫고서 나왔을 때 그들은 오직 젊다는 이유로 세상에 맞설 수 있었다. 그때 영화제작소 청년은 이념 성향이 강한 학생들이 만든 또 하나의 장산곶매였다. 그들은 영화가 세상을 바꿀 총과 칼이라고 믿었다. 혈기방장한 대학생들에겐 당연한 일이었지만 세상이, 영화가 그처럼 만만한 건 아니었다. 한차례 겁없는 도전에 대해 세상은 코웃음을 쳤다. 장산곶매가 사라진 것처럼 청년도 그때 증발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좌절 대신 지혜를 배웠다. 그들은 변혁 대신 영화를 택했고 아마추어리즘 대신 근성을 길렀다. 이후 청년은 매번 주위 변화를 한 템포 빨리 포착한 뒤 자신들만의 돌파구를 마련해갔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무기는 자신들만의 영화만들기였다. 그들은 자생적으로 만든 시스템 하에서 풋내기를 어엿한 감독으로, 열악한 16mm 단편영화를 성실함의 미덕이 가득한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청년의 강령은 하나였다. “영화는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라는. 누군가는 “평생 16mm 영화나 하고 살라”는 저주 아닌 저주를 했지만 그들은 고인 물이 되지 않았다. 청년은 주류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들만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그건 본격적인 상업영화 질서에 뛰어든 청년필름으로 가지를 친 지금도 변치않는 그들의 정신이며 생활이다. 물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내일 그들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분명한 건 적어도 지난 10년간 ‘잘해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1. 예기치 않은 탄압, 살아남은 자의 외로움(1992)

누군가 실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어떤 결정이 옳은 것일까. 이 영화를 상영하면, 곧바로 침탈을 강행하겠다는 협박이 수시로 전해져온다. 누군가는 또 육신을 다칠 터인데. 이게 나 혼자 꾼 악몽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스친다.

“친구들이 감옥과 군대로 흩어지던 목련철”은 어김없이 90년대 초에도 찾아왔다. 이상인 감독도 그 봄을 맞은 이들 중 하나였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상영한 것이 영화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5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건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제작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나리오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낙인찍혀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해가며 수배생활과 제작을 병행했으니. 오히려 낙심은 그때의 육체적인 고통이라기보다 정신적인 공황에서 왔다. 돌아왔을 때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다만 1년 전 달았던 신림동의 영화제작소 청년이라는 명패만 건들거릴 뿐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영화공동체 우카마우 집단을 표본 삼아 전문창작집단을 꿈꿨던 영화제작소 ‘청년’의 시작은 그렇게 암담했다.

사실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1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장편 하나에 매달려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이었다. 대한극장 2층에 있던 독립영화단체 아리랑의 사무실 한쪽 구석에서 ‘모의’를 시작한 것이 1990년 5월. 한양대, 경희대, 서울대, 서울예대 등 4곳 출신, 14명의 청년들은 장편영화 제작을 위해 청년을 결성한다. 대학영화연합 회장 김인수, 민족영화위원회 김응수, 경희대 출신의 남궁균 등이 주도적으로 나섰지만, 이상인과 이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영화를 찍어본 경험이라곤 거의 전무했다. 한편의 영화제작을 위해 자신의 한 학기 등록금을 쏟아붇는 열의는 다들 갖고 있었지만, 문제는 1년 뒤 제작이 완료된 시점에 불어닥친 공안의 칼바람이었다. 그해 4월, 마포의 영화공간 1895에서 열린 <어머니, 당신의 아들> 첫 번째 기자시사회는 급습한 사복경찰들에게 프린트와 영사기를 압수당하는 것으로 끝났고, 결국 이상인 감독은 전대협 회의가 열리고 있던 연세대로 몸을 피하는 처지가 된다. 전국에서 상영투쟁이 전개되면서 약 15만명의 대학생들이 영화를 봤지만, 결국 감독이 철창으로 향하면서 청년은 와해의 기로에 선다.

#2. 우린, 열정을 먹고 자랐다(1993.8)

아직 멀었다. 영화창작 강의는 불발됐고, 단편영화 감상은 실종됐다. 각자의 아이디어를 나누는 1분 말하기는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 구성원 전원이 개인영화를 창작하겠다던 원대한 목표는 어림도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 당신의 아들> 수익으로 마련한 영사기까지 고장났다. 전반기, 우린 영락없는 낙제생이었다

“위기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다만 그건 변화를 위한 자극 이상은 아니었다.” 정지우의 말처럼, 청년은 파선 직전에서 다시 일어선다. 더이상 한국에서 영화작업을 할 수 없었던 이상인 감독이 유학을 결심하는 동안, 새로 들어온 정지우 감독을 중심으로 청년은 재정비에 들어간 것이다. 93년은 그러한 체질 개선의 시작점이었고, 청년의 얼굴은 바뀌기 시작한다. 이선미(현 <와니와 준하> 프로듀서)가 다시 가세했고, 김광수, 이경희(현 미라신코리아 프로듀서), 장희선, 이철민 등 새로운 구성원들의 수혈이 있었다. 이듬해 김용균 또한 가세했다. 영화를 찍고자 하는 그들의 절대절명의 욕구는 청년의 변화를 이끌었다. 선배들과 달리 이들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 자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만들던 청년이 “비제도권에서 전문적으로 영화를 제작하던 장산곶매를 다분히 의식한 결과”였다면, 이제 영화제작소 청년은 이름에 걸맞은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제작에만 매달릴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지향점을 분명히 하긴 했지만, 여전히 구성원들은 정지우 감독을 비롯한 몇명을 빼면 ‘초짜’였다. 만들기 위해선 일단 “배워야 했고, 벌어야 했다”. 시나리오를 매만지기 이전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연습부터 해야 했다. 그때 복기했던 시나리오들은 지금도 청년에 검은 노트로 남아 있다. 카메라로 돈을 벌 수 있는 수익사업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국회의원 홍보영상물 제작부터 각종 집회장면 기록까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결혼식 비디오를 찍는 경우, 아예 60만원씩의 개인 할당액이 떨어졌다. 벌어들인 건 고스란히 최고급 기자재를 구입하는 데 들어갔다. 찍기 위해선 갖추고 있어야 했다. 조명은 기본이고, 최고급 베타캠부터 1천만원이나 하던 DAT 녹음장비까지 이때 갖추었다. 이때 모은 기계는 또다른 생명이었다. 그걸 망가뜨리면, 신체포기 각서라도 써야 할 판이었다. 다들 “사발면에 계란 띄워 먹는 시절”이었지만, 항상 배가 부른 듯 했다.

#3. 영화공장 공장장의 변명(1994.11)

전화가 걸려온다. 분명 김동원 형일 것이다. 민예총 산하 민족영화위원회 회의에 이번에도 빠졌으니 할말이 없다. 지금 영화를 찍고 있다는 말밖에.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괜스레 미안한 맘이 들고, 죄스런 맘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어쨌든 그 형 표현대로 지금 청년의 풍경은 영화공장의 그것이다. 아직 완제품을 내놓지도 못했으니 형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직은 아니다. 남의 평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족하지 못해서다. 좀더 기다려야 한다.

자생적인 시스템을 갖추면서, 청년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커가고 있었다. 어느 한 가지에만 영양분이 쏠리는 기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다들 고르게 자라고 있었다. 생장점의 중심에 품앗이가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구성원 모두가 감독으로, 스탭으로 돌아가며 영화를 만들었다. 김용균이 연출을 맡으면 정지우가 카메라를 들었고, 김진상은 녹음을 맡았다. 임필성이 감독을 맡으면 제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그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감독일 때는 스탠리 큐브릭이고, 스탭일 때는 삼류”인 이들이 나올 리 없었다. 현장을 떠나면, 작품을 놓고서 한바탕 혈투라도 벌일 듯했지만, 현장만큼은 온전히 감독의 것이었다. 첫 시작부터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정지우는 아직도 김용균에게 미안함을 갖고 있다. <원정>을 찍을 당시 콘티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카메라를 안고서 주저앉는 식으로 시위를 했으니까. 아무 말 없이 촬영감독이 따라주기를 기다리는 박찬옥이라는 강적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애초 “만들면 아무래도 좋았다”는 이들은 16mm 영화의 후반작업에 욕심을 키웠다. 자신들도 모르는 것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영화 감독 헬렌 리가 속시원히 긁어줬다. 내한했을 때 청년 사무실에 들른 헬렌 리와 작품을 보고 나눈 토론 끝에 청년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편집부터 녹음까지, 이제 고민은 끝맺음에 집중되어야 했다. <생강>은 그런 산고 끝에 태어난 작품이었지만, 정작 후반작업을 하면서 이들은 끝맺음이 청년만의 문제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낀다. 네가필름을 현상소에 맡긴 뒤 19개 프레임이 찢겨 사라지고, 사운드 싱크가 밀려 소리와 화면이 맞지 않는 등 6번째 프린트가 탄생하기까지 가슴 서늘해지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청년의 새파란 가슴을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4. 평생 16mm 영화나 하고 살아라(1996)

어느 누구 하나 철수하는 조명팀을 말리지 않았다. 가면 가라지 하는 심정이었다. <저스트두잇>은 충무로 조수들과의 첫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들 눈에 16mm는 카메라가 아니라 장난감처럼 보였나 보다. 시스템의 차이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엔 우리쪽 실수라고 하면, 인정했다. 카메라 앵글을 먼저 잡아놓을 경우, 조명 치는 게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건 함께 상의해서 풀어가야 할 문제였다. “네가 촬영감독이냐, 셔터맨이지. 야, 줄 걷어” 식의 험담이 터져나올 줄은 몰랐다. “평생 16mm 영화나 하고 살아라”는 그들을 보면서, 우린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도대체 우린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 “그래, 우리 평생 16mm 영화하고 살련다”는 다짐이었을까.

96년은 영화제작소 청년의 해였다. 그해 <생강>이 제3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젊은 비평가상, 예술공헌상을 휩쓸었고, <낙타뒤에서>를 들고 온 이상인 감독도 심사위원 특별상을 탔다. 생계와 가사와 육아를 어깨와 허리에 두른 노동운동가의 아내에 관한 <생강>은 “짧은 길이, 평이한 구성이지만 인물의 성격과 구체적 상황이 선명”하고 “현실의 아픔을 허위의식 없는 따뜻한 시선으로 섬세하게 관찰했다”는 찬사를 독차지했다. 같은 해 열린 제1회 여성영화제에서도 이런 상황은 반복됐다. 박찬옥의 <있다>와 장희선의 이 나란히 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온갖 매체가 신기루처럼 나타난 영화제작소 청년을 주목했다.

청년 내부에서는 “상 안 주면 영화 못 만들 것 같은 이들만 골라서 준 것”이라고 농담을 나눴다지만, 영화제 수상만이 청년의 저력을 증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해 영화제작소 ‘청년’은 구성원 대부분이 개성 짙은 작품들을 내놓았다. 임필성의 <기념품>, 김용균의 <저스트두잇>, 김진성의 <스트라이커> 등이 나왔다. 특히 <스트라이커>의 경우,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을 그린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그동안 필름으로 극영화 작업에 주력했던 청년의 관심의 폭이 넓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해외 유학파 젊은 감독들이 외국 스탭들과 작업한 창작물이 각광을 받던 시절, 개인의 자양분이 아니라 공동의 자산으로 남겨놓을 수 있었던 청년의 성과는 지금 돌아봐도 실로 소중하다.

#5. 이건 투항이 아니다(1998.3)

장산곶매는 신화였다. 하지만 이제 형체는 없다. 충무로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감독들도 있지만, 장산곶매는 이곳에 없다. 그러긴 싫다. 청년의 이름으로 가야 한다. 감독과 시나리오만을 다른 제작사에 넘기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마지막에 꺼내야 할 카드다. 캐스팅과 파이낸싱이 안 된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1997년 11월. 영화제작소 청년은 장편영화를 준비하는 청년필름과 분리된다. 누군가 충무로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다른 감독이 아니라 청년 출신 감독의 영화를 제작하기로 약속했던 김광수, 이선미, 심현우 등이 정지우, 김용균 등과 결합하면서 장편팀이 꾸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먼저 추진키로 했던 <해피엔드>는 시나리오 초고가 나온 지 1년 가까이 파이낸싱과 캐스팅이라는 충무로의 거대한 벽에 부딪혀 있었다. 지금까지야 단편제작비니까 직접 벌어서 충당했고, 사정해서 출연시켰지만, 슬슬 산업화의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충무로를 정면 돌파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독자적인 진출은 어렵게 됐다는 판단을 한 청년필름은 기존 충무로의 제작사와 담판을 준비한다. 적어도 프로덕션의 전체적인 실무 운영만큼은 청년필름에게 맡겨달라는 제안을 품은 것이다. 상대인 명필름은 예상 외로 흔쾌히 역할 분담을 수락했고, 굳이 반복하지 않아도 좋을 <해피엔드>의 순항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청년필름으로 자리를 옮긴 이들 대신 새로운 성원을 받아들인 영화제작소 청년도 수서를 거쳐 마포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달라진 건 작업실뿐이 아니다. 작업방식도 뒤따라 바뀌었다. 100% 개인작업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팀워크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모든 팀이 한 작품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팀내 스탭은 여전히 구성되지만, 외부 스탭과도 같이 결합하는 방식이다. 97년에 만든 박찬옥 감독의 <느린 여름>이 영화제작소 청년팀만으로 만든 마지막 작품이고, 이후 <고추말리기> <재희 이야기> 등은 팀내 스탭을 구성하되, 외부 스탭과 결합해서 만들었다. 별개로 운영되지만, 청년필름은 영화제작소 청년에게 큰 힘이다. 지금의 멤버들이 충무로 현장에 접할 수 있는 다리구실을 한다. 현재 몇몇 감독들은 청년필름이 넓혀놓은 충무로의 지형을 직접 탐사중이다.

#6. “가는 길은 즐겁지만, 돌아오는 길은 두렵도다”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다. 충무로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안다. 독립영화만이 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따로 있다. 그렇다고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내가 영화를 만드는 동안은 까불지 않을 생각이다. 그게 옳은 태도인 것 같다.”(<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 “돌아갈 수 있을까. 모색이 필요할 때는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재미를 전해줄 수 없다면, 어디든 가야겠지. 또다른 ‘청년’을 찾아서.”(<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 청년의 역사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먼훗날에도 그들은 신화로 남기보다 살아 있기를 간절히 원할 것이다. 카메라를 부여안은 채로.

이영진 기자 ant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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