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영화 <스파이키드>와 로드리게즈 영화의 매력
지금부터 10년전인 1991년 여름, 텍사스 주립대학 영화과 수업을 청강하던 23살 청년은 '파마코'라는 의약품 연구소의 특수한 병동에 갇혀 있었다. 신제품의 약효를 테스트하기 위해 행하는 임상실험에 참가한 그는 한달간 인간 모르모트가 되기로 자청했다. 이런 일에 뛰어든 이유는 감옥같은 생활을 한달만 하면 3000달러를 벌 수 있는데다, 온전히 시나리오 쓰는 데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 7월3일, 연구소를 나왔을 때 그의 손엔 장편극영화를 찍을 시나리오와 제작비의 절반에 조금 못미치는 돈인 3000달러가 있었다. 약간의 준비작업을 거친 7월31일, 그는 멕시코에서 첫 촬영을 시작했다. 청년의 이름은 로버트 로드리게즈. 제작비 7000달러짜리 장편데뷔작 <엘 마리아치>는 그렇게 태어났다.
제작비는 최소, 흥행수입은 최대
90년대 할리우드가 낳은 최고의 아메리칸 드림 가운데 하나인 <엘 마리아치> 성공담은,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가락처럼 아득하다. 로드리게즈는 그간 극장용 장편 <데스페라도> <황혼에서 새벽까지> <패컬티>를 완성했고, TV영화 <로드레이서>를 만들었으며, 옴니버스 영화 <포룸>의 에피소드 하나를 선보였다. 어느새 '신동'이니 '악동'이니하는 별칭을 붙이기에 쑥스러울, 경력 10년차 감독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엘 마리아치> 때의 작업방식을 고수한다. 최소의 제작비로 찍고 1인3역쯤 거뜬히 해내며 할리우드가 아니라 자기 고향인 텍사스의 소도시 오스틴에서 작업하는 스타일이 그것이다. 촬영장에 내내 붙어있는 스탭이 1명도 없던 <엘 마리아치> 때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그의 영화에 참여하고 있지만 로드리게즈가 일하는 태도는 여전히 인디영화에 가깝다. 미국에서 올해 봄에 개봉한 <스파이 키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인 엘리자베스 아벨란이 제작을 맡은 이 영화에서 그는 시나리오를 쓰고 일부 장면은 직접 찍었으며 다른 영화 때와 마찬가지로 직접 편집을 했다. 상당한 특수효과와 컴퓨터그래픽이 들어간 작품이지만 로드리게즈는 오스틴에 있는 자기 집 창고에서 이런 작업을 시도했다. 온갖 특수장비와 세트, 자동차, 비행기 등의 디자인을 직접 그린 다음 캐나다에 있는 그래픽회사에서 보내 작업한 뒤 결과를 보내오면 컴퓨터 모니터로 보고 화상회의를 거쳐 수정하는 식이었다.
할리우드를 놀라게 한 건 그 결과다. 제작비 3600만달러의 가족영화 <스파이 키드>는 국내 흥행수입 1억달러가 넘는 블럭버스터가 됐다. 이것은 배급사 미라맥스가 거둔 올해 최고 기록인데다 엄청나게 남는 장사다. 비근한 예로 제작비 1억달러인 <스튜어트 리틀>의 흥행수입은 1억4000만달러였고 9000만달러를 들인 <형사 가제트>는 9740만달러, 8500만달러를 투자한 은 6690만달러를 벌었다. <스파이 키드>처럼 국내 흥행수입만으로 제작비의 3배를 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게다가 <스파이 키드>의 주인공인 두 꼬마는 라틴계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라틴계 배우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은 지극히 제한돼 있었다.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예외적인 스타이긴 하지만 라틴계 배우들은 악역이거나 여배우인 경우 탄력적인 몸매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다반사다. 블럭버스터급 영화라면 더더욱 배우들의 피부색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데 <스파이 키드>가 라틴계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편집도 직접 특수효과도 직접, 1인다역의 연출자
그는 흥행결과로 할리우드를 만족시키는 감독이지만 결코 메이저가 하자는 대로 따라하는 연출자는 아니다. 아마 <스파이 키드>의 제작비가 5000만 달러를 넘었다면 아무리 로드리게즈라도 라틴계 배우로 포스터를 도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타블릿 뉴스페이퍼>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스파이 키드>는 그렇게 예산이 큰 영화가 아니었다. 만약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면 훨씬 조심스러웠을테고 스튜디오의 간섭도 많았을 거다. 많은 감독들이 스튜디오의 간섭에 대해 불평하지만 그건 그들이 너무 많은 돈을 쓰기 때문이다. 더 적게 쓰고 더 창의적이 되면 그들은 감독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스튜디오의 압력에 맞서는 로드리게즈의 비결은 첫째 돈을 적게 쓴다는 점이다. "제작비 예산을 들고 스튜디오를 찾아가면 그들은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한다. '정말 이정도 제작비로 이런 영화를 찍을 수 있단 말인가요'라고. 그들은 촬영이 끝나는 날까지 믿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돈을 안들이는 건 아니다. 로드리게즈는 기꺼이 혼자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편집을 직접 하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데스페라도> 때는 스테디캠 장면을 직접 찍기위해 따로 사용법을 배웠다. 심지어 그는 <스파이 키드>를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가 특수효과와 컴퓨터그래픽에 대해 전문지식과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는 수퍼바이저를 따로 두지않고 <스파이 키드>에 쓰인 500여개 특수효과 장면을 연출했다. "어빈 커쉬너가 AFI에서 강의할 때 말한 게 기억난다. <제국의 역습>을 만들 때 얘기였다. 추바카가 등에 C3PO를 업고 달리는 장면이었는데 아무리 해도 리모트 콘트롤이 말을 안들었다. 결국 어빈 커쉬너가 낚시줄로 C3PO의 손과 추바카를 묶으라고 해서 겨우 C3PO를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놀랍지 않은가. 영화라는 게 그런 거다. 낚시줄, 성냥, 연기, 거울 같은 걸로 없던 걸 만들어낸다. 난 대가족에서 자랐고 우리 형제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들이면 훌륭한 특수효과가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옳은 태도가 아니다. 돈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다."
물론 아무나 그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가 쓴 책 <독립영화 만들기>(Rebel Without a Crew, 황금가지 刊)에 적힌 대로, 로드리게즈는 <엘 마리아치>로 '발견'된 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너도나도 작품계약을 맺으려고 안달했던 인물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너무 잘 아는 인물이었다. 초등학교때 교실 뒷자리에 앉아서 사전의 빈칸에 그림을 그려넣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주인공이 움직이는 모습에 열중하던 그는 10살 때부터 아버지가 우연히 구입하게 된 비디오로 영화를 찍었다. 유년시절 비디오로 영화를 접한 첫 세대에 속하는 로드리게즈에게, 영화는 처음부터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드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성적미달로 영화과 수업을 들을 수 없게되자 그는 자기가 만든 영화를 보여주며 교수를 설득했다. 액션을 잘 찍는 감독으로 정평이 난 것도 특별히 액션연출에 조예가 깊어서라기보다 테크니션으로서 재능이 일반적으로 액션연출에서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2000개가 넘는 커트를 제대로 이어붙게 찍는 것부터가 쉬운 일은 아닌데 <엘 마리아치>는 고작 1만자 필름으로 이걸 깔끔히 해낸 것이다.
34살 청년,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실 로드리게즈는 액션 자체에 대단한 의미를 두는 감독은 아니다. 가벼운 코미디 속에 액션을 녹여내는데 그게 돋보이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스파이 키드>에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도 유년 시절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들이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마르크스 형제들의 코미디라는 사실이다. 전작들도 엄숙한 분위기의 액션영화는 아니었다. <데스페라도>에서 스티브 부세미가 장광설을 펼칠 때 이어지는 첫 액션시퀀스나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뱀파이어들과 싸우는 장면들을 보노라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로드리게즈 특유의 과장된 몸짓과 과격한 카메라 움직임도 만화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데스페라도>에서 화염을 등지고 건물 옥상에서 긴 머리를 휘날리며 유유히 걷는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샐마 헤이엑은 진지한 자세로 보는 관객에겐 납득할 수 없는 장면이다. 멋지게 보이는 이런 장면은 의도된 유머이며 로드리게즈 영화의 감상법은 이럴때 웃어주는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절친한 사이가 된 것도 이런 공통점에 기인한다. 타란티노 역시 액션과 코미디를 뒤섞은 스타일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었으며 비디오로 영화를 배웠다. 타란티노가 비디오를 많이 보고 시나리오를 쓰는 걸로 출발했고 로드리게즈는 비디오로 많이 찍는데서 시작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확실히 그들에게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에 유희였다. 그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었고, 빠르고 유머러스하며 소란스런 이들 영화는 곧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타란티노가 각본을 쓰고 로드리게즈가 연출한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두 악동이 머리를 모아 만든 최고치였다. 표면 아래 거대한 의미가 숨쉬고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B급 문화의 거침없는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러나 로드리게즈와 타란티노는, 오우삼 영화에 광분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오우삼의 무엇에 매료되느냐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 타란티노가 갱스터 장르의 묘미에 천착한 것과 달리 로드리게즈는 눈을 뗄 수 없는 멋진 화면과 화려한 테크닉에 집착했다. 그것은 정확히 <재키 브라운>과 <스파이 키드> 사이 거리만큼 먼 것이다.
남미권 비디오 시장에 팔아보려고 만든 <엘 마리아치>로 재능을 인정받은 탓에 <데스페라도>를 찍고, 타란티노와 인연으로 <황혼에서 새벽까지>와 <포룸>을 찍었지만 그는 정작 만들고 싶었던 것은 '가족영화'였다고 말한다. 습작기에 그가 만든 영화들이 모두 자기 가족을 담은 코미디였고 대학시절 그린 연재만화도 그랬다. 남자 다섯, 여자 다섯, 무려 10남매가 사는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형제자매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었고 대학시절 여동생 마리 카르멘의 이야기를 소재로 <로스 훌리건스>라는 네컷 만화를 연재했다('로스 훌리건스'는 후일 로드리게즈의 제작사 이름이 됐다). 가족 코미디야말로 로드리게즈의 출발점인데 그가 <스파이 키드>를 "외도가 아니라 제자리찾기"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것이다. <스파이 키드>를 보면 이 34살난 감독의 상상력이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지 알 수 있다. 기타통에서 로케트가 발사되는 <데스페라도>의 만화같은 발상을 집대성한 듯한 <스파이 키드>에는 8살 꼬마가 '첩보원'이라는 단어에서 연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실제로 로드리게즈는 <스파이 키드>가 "어린이가 만든 영화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더이상 생각이 안떠오를 때면 어린 시절 내가 그린 그림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이젠 내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상상력이 풍부한지 다시 깨닫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상상에 제약이 생기게 마련이다. '아, 그건 안 통할거야', '이건 좀 억지스러운 거 아닐까' 여기게 된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그러지 않는다. 난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만든게 아니라 내 아들이 만든 것처럼 느꼈으면 싶다." <스파이 키드>의 악당들이 무섭지 않고, 악당의 명령을 따르는 엄지로봇들도 그저 귀엽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상상력과 테크닉, 두 날개를 달고
분명 로드리게즈는 스타일과 세계관에서 혁신적인 작가로 꼽힐만한 인물이 아니다. '억세게 운좋은 녀석'이라는 질시를 받을만큼 그의 영화경력은 순탄하게 풀렸다. <스파이 키드>로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뒀던 꿈도 실현하고 할리우드로부터 받는 신망도 높였으니 앞으로 그를 구속할 것은 없어보인다. 그렇지만 성공의 비결을 단지 운에 돌릴 순 없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아르바이트하던 사진현상소 상사가 해준 다음과 같은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실천해왔다. "당신에겐 창조적인 재능이 있다.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기술적인 면에서도 뛰어나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술적으로 세련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창조적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창조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마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이 기술적으로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떤 사람을 창조적일 수 있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기술적인 것들을 잘 이해하는 재능의 결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결론은 만약 어떤 사람이 창조적인 재능을 이미 갖추고 있는데다가 기술적으로 세련되기까지 하다면 누구도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건 상상력과 테크닉이라는 두 날개를 단 로드리게즈가 할리우드라는 제한구역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까닭이기도 하다.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
▶ 할리우드의 영원한 악동, 로버트 로드리게즈
▶ 로버트 로드리게즈 필모그래피
▶ 로드리게즈가 말하는 <스파이 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