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았지? 놀랐지?
발칙한 상상력과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해온 단편걸작선은 올해도 그 기대에 부합하는 단편 41편을 불러모았다. 예년에비해 호러의 비중이 줄어든 대신 기발함이 돋보이는 코미디, 드라마, 스릴러, 액션, 실험영화 등으로 장르가 매우 다양해졌다. <굿 로맨스>
<외계의 제19호 계획> 등 한국 단편도 11편을 차지한다. 출품자 리스트에 낯익고 반가운 이름도 보인다. <비디오드롬>
<데드링거> <크래쉬> 등을 통해 테크놀로지에 침범당한 인간의 신체와 욕망을 기이한 영상에 담아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그가 만든 단편 <카메라>도 부천에 온다. 아직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이 작품은 캐나다 토론토영화제 25주년 기념으로 만든 옴니버스 장편프로젝트 중의 하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한순간 급속하게 또 끔찍하게
늙어버리는 꿈을 모티브로, 한 노인을 통해 감독 자신이 영화, 카메라와 맺어온 관계를 고찰하는 작품이 될 듯하다.
이번 단편걸작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애니메이션 작품들. 셀과 종이, 점토와 컴퓨터는 이제 그 어떤 영상 실험에도
가로거칠 것이 없다는 듯 다양한 이야기를 건넨다. <하라라>는 인형애니메이션
하면 으레 떠오르는 귀염성과 발랄함을 지워낸 자리에, 음산하고 기괴한 오컬트적 요소를 끌어다 앉힌 호러애니메이션.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늙은
고고학자가 병실에서 치료받는 현실과 파라오의 무덤을 탐사하는 환상을 오가다가, 두 세계가 하나로 만나는 경험을 한다. 병약해진 고고학자의 침상에
집착이 빚어낸 환상이 밀려드는 과정을 공포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이 밖에 점토애니메이션 <불의발굽>은 루돌프의 아들 로비의 수난과 성장과정을 그린, 영화적 재미가 충만한 작품. 가업을 전승하기 위해 산타클로스의
썰매팀을 찾은 로비가 사슴들의 올림픽인 레인디어 게임에 출전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캐릭터가 강한 점토애니메이션으로 이름난 아드만 스튜디오 출신
감독의 작품이다. 선사시대 인간과 사냥감 사이의 심리전과 육박전을 그린 <호모 사피엔스>,
애완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하던 꼬마 달팽이의 이야기 <달팽이>는
희비가 엇갈리는 삶의 순간순간을 잡아낸 코믹한 작품들. 좀더 진지하고 깊은 성찰이 담긴 작품들도 있다. 낭만과 자유를 추구하던 이웃집 남자에
대한 추억 <눈이 아름다운 남자>, 두명의 카우보이를 통해 쾌락과
유희가 남긴 것들을 되짚어보는 <링 오브 파이어>, 바깥 세상에
나가길 열망하는 냉장고 속 요구르트들의 혈투 <미스틱 요구르트>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각기 독창적이고 흥미진진한 화법으로 풀어낸 수작들이다.
앞에 제시한 많은 복선을 모두 배반하는 반전으로, 관객에게 ‘속았다’는 묘한 쾌감을 주는 작품들이 있다. 대표적인 영화가 <올드맨>.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노인은 노망난 것이 아니라 소기의 목적(?)이 있어서 그런다. <지킬
건 지켜야지>는 먼 미래의 지하철 속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죽어 마땅한’ 이유를 마지막에 밝힌다. <파일럿>은
<델리카트슨 사람들> 등에 출연한 도미니크 피뇽이 파일럿으로 분하는데, 그가 조종하는 비행물체의 정체가 이야기의 열쇠다. 판타지와
결합한 우화들도 있다. <거위의 복수>는 거위의 공격으로 한쪽 눈을
잃고 식용거위공장에서 일하는 남자와 끊임없는 성형수술로 가슴을 크게 만드는 부인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물리적인
속도에 초연한 노작가가 그를 방문한 죽음의 신마저 따돌릴 수 있을지를 묻는 <마지막 질문>도
코믹하고도 초연실적인 상황에 의미심장한 주제를 끼워넣은 재치있는 작품.
양적으로 열세이긴 하지만 호러영화들도 대기중이다. <여명의 살인마>는독일산 슬래셔영화. 젊은 연인이 카섹스에 몰두하고 있는 설원 밖에는 도끼를 든 살인마에게 쫓기며 구원을 청하는 손길이 있고, 연인 역시 살인마의
도끼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살 비디오를 찍는 비디오 아티스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과정을 그린 <일리야>,
평소 연모하던 여인의 결혼소식에 상심한 정육점 남자의 살기어린 판타지를 그린 <트로펠>도
호러적 요소를 곁들이고 있는 작품이다. 실험영화의 등장도 흥미롭다. 추상적인 이미지의 나열을 통해 열반의 상태를 그려내는 <열반의
길>, 의자부터 인체까지 사물의 해체와 합체과정을 담아낸 <인 디비두>,
생산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에 대한 탐구 등이 그
작품들.
박은영 기자 cine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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