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취인불명>으로 ‘비로소’ 폭넓은 지지 획득한 김기덕 감독의 잔혹미학
“어차피
이 땅에서 나는 부작용이나 이물질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작용이 작용하게 해보고 싶었다.” 어떤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김기덕 감독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는 자기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대체로 주류의 관심권 밖에 있었다. <섬>이 베니스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뒤로 그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김기덕 영화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지고 있지만 그의 영화가 주류를 향해 움직였다고 보긴 힘들다. 음지나 사막에서도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듯 김기덕
영화는 빛과 수분이 부족한 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번번이 스쳐지나던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6번째 영화 <수취인불명>은 지금까지
김기덕 영화 가운데 가장 폭넓은 평론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먼 길을 돌아 결국 김기덕은 주류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도록 설득해냈다. 김기덕
영화 각각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겠지만 그의 말대로 “부작용이 작용하게 만든 것”만은 분명해진 걸로 보인다.
물론 <섬>을 비판했던 평자들까지 <수취인불명>를 높이 사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김기덕은 이번 영화에서 ‘이미지는 강렬하지만 이야기는상투적’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켰다. 미군 기지촌 주변,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겹쳐지면서 만들어내는 악순환의 고리는 <수취인불명>의 시간을
남김없이 빨아들여서 영화를 보는 동안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관객을 절망의 밑바닥까지 끌어내린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치다 쓰러지는
인물들을 목격하는 게 새로운 건 아니지만 <수취인불명>을 더 비극적으로 만드는 건 그들의 유전적 결함이 피를 섞고 유전되어 영겁의 윤회로까지
이끌린다는 점이다. <악어>에서 <섬>까지 영화들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어떤 공간에 붙들려 있다면 이번 영화에서 그는 시간마저 포획한다.
문신을 칼로 도려내고, 멀었던 눈이 다시 떠진대도 저주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신경세포에 각인되어 무의식의 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와 영혼에 치명상을 입히고 만다. 그는 이제 완전히 닫힌 시공간이라는 새로운 영토에 발을 디딘 것일까? 아니면 6편을 만드는 동안 장인의
경지에 이른 것일까?
분명한 건 <수취인불명>이 주류를 향해 화해의 악수를 청한 영화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악취미, 엽기, 도발, 충격’이라는
말을 들을 게 뻔한 그림들을 얼굴빛 한번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전시한다. 97년 <야생동물보호구역>이 개봉할 때 무관심을 표했던 각 언론사
문화부 앞으로 편지를 보내 “악어가 허옇게 배를 뒤집고 죽어가고 있다”며 울분에 찬 항의를 했던 그는 이제 이해를 구하는 대신 세상과 불화하는
감독이라는 이미지를 달게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듯하다. 그것은 초월이라기보다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외부의 시선이 어떻든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이제 확고해 보인다. 김기덕 영화의 진정한 성취가 <수취인불명>인지 데뷔작 <악어>에서 비롯됐는지는 또다른 쟁점이지만 어쨌든 무성한
잎을 싹틔운 김기덕 영화의 뿌리는 이미 아무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90년대 중반부터 이뤄진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진폭은 김기덕이라는 자장을 흡수하지 않고는 정확한 그래프를 그릴 수 없게 됐다. 단적으로 홍상수 영화가 우리의 구질구질한 욕망를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김기덕 영화는 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추한 본능을 드러내는 내시경이다. 이창동의 <박하사탕>이 타락한 세상에 대한 절규라면 김기덕의 <수취인불명>은
닫힌 사회에 대한 공포이다. 김지운이 절망으로부터 도피할 것을 권한다면 김기덕은 절망과의 정면승부이다. 어느 쪽도 누굴 대신할 수 없는 이들
작가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예술적 진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김기덕의 영화가 주장해온 것도 그런 얘기이다. 비록 창녀나 부랑자나 살인자처럼 극단적인 양상일지라도 다양한 삶과 여러 가지 영화적 표현을
인정할 것, 이면에 억눌려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떤 심층을 응시할 것, 전통적 가치와 도덕관념이 둘러싼 마음의 감옥을 깨트려 뛰쳐나올 것.
그의 인물들처럼 그의 영화도 냉대와 멸시의 기억을 안고 있지만 김기덕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빛은 그런 차별을 녹인다. 그들은 문명과 질서의
지배를 벗어난 원시적인 우리이지 공존을 거부할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김기덕 영화가 제공하는 이미지의 기습은 불현듯 깨닫게 해준다. 2천년
전 태어난 성인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했지만 김기덕은 이렇게 덧붙이는 것 같다. “네 못난 이웃의 상처를 보라. 경험하라. 그런 다음
사랑한다 말하라.” 김기덕의 영화는 그 실천이다. 글 남동철 기자 ·사진 정진환 기자
▶ 김기덕,
한국영화의 낯선 ‘섬’
▶ 상처와
고름의 미학
▶ 네티즌과
김기덕 감독이 나눈 10문10답
▶ 김기덕이
말하는 `영화만들기 1996~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