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스탠리 큐브릭 등 20세기 영화역사를 증거하는 거인들이 하나둘 사라진 지금, 제54회 칸영화제는 거장들과 만나는 마지막 잔치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올해 경쟁부문엔 유난히 노익장의 영화가 많았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 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에르마노 올미, 이마무라
쇼헤이 등이 모두 일흔살 넘은 거장들. 한때 전통과 관습에 반기를 들며 새로운 물결을 이끌었던 그들이 이제 ‘아버지의 영화’를 대표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각국의 뉴웨이브가 ‘아버지의 영화’를 부정하는 데서 시작했다지만 이들이 만든 영화는 결코 지금 세대를 질곡에 빠트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지금도 젊은 세대보다 앞서나가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최소한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다리 밑의 따뜻한 물>, 자크 리베트의
<알게 되리라>,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나는 집으로 간다>는 세월이 쌓여 이룩된 노인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게 되는 영화들이다.
세 거장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충고를 화면에 새겨넣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관록 - 올리베이라의 <나는 집으로 간다>
현역감독 중 최고령임에 틀림없는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나는 집으로 간다>(Vou Para Casa)는 올리베이라지지자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받은 작품이다. 노인이 된 어느 연극배우의 일상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올해로 93살인 감독 올리베이라의 요즘 심경처럼
보인다. 화면이 열리면 연극무대가 보인다. 미셸 피콜리가 주인공인 연극배우로 등장하는데 연극이 끝나자마자 그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노인에겐 이제 어린 손자만이 남았다. 매일 같은 카페의 같은 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고 커피를 마시는 한적한 날들이 몇 가지 사건으로
방해받는다. 밤길에 강도를 만나 그날 낮에 새로 산 구두를 뺏기고 매니저는 TV 연속극에 출연할 것을 종용한다. 어느 날 노인은 미국감독(존
말코비치)으로부터 출연제안을 받고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다. 대사가 무척 많은 영화현장에서 그는 몇 차례 대사를 까먹는 실수를 하고 마침내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나는 집으로 간다.” ‘영화도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일컫는 건지 모른다. 올리베이라는 나이가 든다는 것, 홀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면서도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의 슬픔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꼿꼿하게 늙어가는 주인공의 삶은 매력적인데 기자회견장에서 미셸 피콜리는
이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자세”라고 표현했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그럴수록 모든 것이 모호하고 의심스러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거절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를 향해, 어떤 때 ‘NO’할지 배워야 한다.” 세 거장의 충고는 귀담아들을 만한 것이다.
욕망과 성에 대한 찬가 - 쇼헤이의 <붉은 다리 밑의 따뜻한 물>
올해 상영작 가운데 가장 유쾌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는 단연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다리 밑의 따뜻한 물>(WarmWater Under A Bridge)이다. <우나기>의 두 주인공, 야쿠쇼 고지와 시미즈 미사가 출연한 이 영화에서 감독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모든 걸 잊고 여자의 품에 안기게. 일상사의 번뇌를 잊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란 말일세.” 주인공 남자는 실직한
가장. 쉽게 일자리를 얻지 못하던 그는 어느 날 과거를 알 수 없는 부랑자 노인이 했던 말을 상기한다. 한쪽에 붉은 다리가 있고 반대편으로
바다가 보이는 어떤 집에 보물을 숨겨뒀다는 노인의 말은 별 신빙성이 없어보였지만 하릴없는 남자는 그가 말한 장소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남자는
기이한 여자에게 이끌린다. 그녀는 이 낯선 남자를 자기 방으로 끌고가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안아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 여인의 몸에서 분수처럼
물이 솟아오른다. 방 안 가득 양동이로 퍼내야 할 만큼 많은 물이 그녀 몸에서 나와 붉은 다리 밑으로 흘러들고 따뜻한 물을 맛보러 고기떼가
몰려든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에서 이마무라 쇼헤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욕망과 성”이라고 말한다. 삶에 대한
긍정적 시선과 낭만적 찬가로 가득 찬 이 영화는 칸의 극장에서 가장 많은 웃음이 터져나온 작품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폐막 하루 전 열린 기자회견에는
이마무라 쇼헤이가 건강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다. 두 주연 야쿠쇼 고지, 시미즈 미사와 프로듀서인 이노 히사가 감독을 대신해 인사를 나눴는데 이
자리에서 이노 히사는 “영화를 찍은 뒤 몸이 많이 쇠약해졌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아져서 영화제에 참석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5월부터 다시 몸이 약해져 여행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여러분께 죄송스럽다”는 감독의 메시지를 전했다.
드물고도 아주 즐거운 센세이션 - 리베트의 <알게 되리라>
상영시간 긴 영화로 악명(?)높은 감독 자크 리베트의 신작 <알게 되리라>(Va Savoir!) 또한 유쾌한 인생찬가다. <카이에뒤 시네마> 평론가 시절, 가장 박식한 인물로 평가받던 그는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처럼 대중적 인기까지 확보한
감독은 아니었다. 무려 12시간40분짜리 영화인 <아웃원>을 만든 전력이 입증하듯 그의 실험성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것으로 소문났다.
그러나 이번 영화 <알게 되리라>는 좀 다르다. 연극무대를 중심으로 6명의 남녀가 펼치는 엇갈린 사랑을 보여주는 <알게 되리라>는
요소요소에 재치와 지적 유머가 들어 있는 영화다. 영화는 연극무대와 현실을 오가며 연극보다 훨씬 극적이고 아이러니하며 코믹한 현실을 보여준다.
흔한 멜로드라마의 틀을 빌렸지만 리베트는 에릭 로메르처럼 건조하면서 담담하게 혼란스런 애정의 양상을 관찰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숨기며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하지만 결국 욕망이 이끄는 결과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알게 되리라>는 상영 직후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작품이다. 2시간36분이라는 다소 긴 상영시간이지만 드라마 전개에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영화라는 게 대체적인
현지 평이었다. <할리우드 리포터>의 마이클 레크샤펜은 “미소를 짓게 만드는 영화, 올해 칸의 고만고만한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드물고도
아주 즐거운 센세이션”이라고 말했다.
칸=글 남동철 기자 ·사진 손홍주 기자 ·통역 이수원
▶ 제
54회 칸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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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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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영국과 독일영화들
▶ 칸
마켓의 한국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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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려상
<아들의 방>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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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대상
<피아노 선생님> 감독 & 배우 인터뷰
▶ 아메리카의
드림 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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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없던 남자> 감독 조엘 코언 & 에단 코언
▶ <멀홀랜드
드라이브> 감독 데이비드 린치
▶ <서약>
감독 숀 펜
▶ 3인의
거장, 세가지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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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으로 간다> 감독 마뇰 드 올리베이라
▶ <붉은
다리 밑의 따듯한 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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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되리라> 감독 자크 리베트
▶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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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몇시니?> 감독 차이밍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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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맘보> 감독 허우샤오시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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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하르>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