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영화는 고전적 예술이다. 그렇다면 왜 가장 찬미할 만한 것, 즉 이런 저런 감독의 재능뿐 아니라 그 시스템의 천재성을 찬미하지 않는가?”
앙드레 바쟁의 이같은 말을 오늘날 미국영화에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판단일까? 할리우드의 오랜 장르 전통을 높이 평가한 그의 말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릇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5편의 미국영화는 프랑스 평론가의 혜안을 뒷받침한다. 개막작인 바즈
루어먼의 <물랑루즈>는 버스비 버클리, 빈센트 미넬리의 뮤지컬 전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영화이다.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슈렉>은
어떤가? 디즈니에서 비롯된 귀엽고 예쁜 캐릭터들이 없었다면 <슈렉>의 못생긴 주인공이 돋보일 수 있었을까? 여기에 조엘 코언의 <거기에
없던 남자>,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숀 펜의 <서약>은 필름누아르의 역사와 떼놓고 생각하는 게
불가능한 작품들이다. 올해 칸 경쟁부문의 미국영화들은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영화 속 인물의 깊이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반복되는 행동과
중첩된 이미지만으로 거대한 의미가 배어나오는 영화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올해 칸은 미국영화의 저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영화제 기간 동안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들이기에 조엘 코언과 데이비드 린치의 감독상 공동수상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가 개인예술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지점에 있다는 걸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회색공간 속 이발사의 추락 - 코언의 <거기에 없던 남자>
조엘 코언의 <거기에 없던 남자>(The Man Who Wasn’t There)는 40년대 필름누아르의 분위기를의도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물론 코언 형제에게 이런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분노의 저격자> <밀러스 크로싱> <파고>로
이어지는 범죄영화에서 그들은 장르의 규칙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지난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자기식으로 해석한 유쾌하고 화사한
뮤지컬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를 내놓았던 코언 형제는 <거기에 없던 남자>에서 다시 한번 <파고>의
회색공간으로 회귀했다. 흑백으로 찍은 이번 영화에서 중심에 놓인 인물은 에드 크레인이라는 이발사다. 빌리 밥 손튼이 연기한 이 사람은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시종 아무 표정없는 얼굴로 등장한다. 배경은 1949년 여름 캘리포니아 북쪽 소도시, 크레인은 하루 종일 손님들 머리만 쳐다보는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길 바라는데 어느 날 이발소를 찾은 한 남자가 드라이크리닝을 하는 기계가 떼돈을 벌어줄 거라며 바람을 넣는다. 1만달러만
있으면 지긋지긋한 이발소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 크레인은 아내가 바람핀다는 사실을 알고 아내의 정부이자 그녀의 직장상사(제임스 갠돌피니)에게
협박편지를 쓴다. 1만달러만 내놓으면 사실을 눈감아주겠다는 협박은 제대로 먹혀 원하던 돈을 얻지만 크레인은 아내의 정부에게 꼬리를 밟힌다.
정부는 크레인을 불러놓고 “당신은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이냐”며 화를 낸다. 아내의 부정을 이용해 돈을 벌려던 크레인의 행동은 <파고>에서
아내를 납치해 한몫 잡으려던 남자와 비슷하다. 사소한 이기심과 돈에 대한 집착이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데 <거기에 없던 남자>의
크레인은 우발적으로 아내의 정부를 죽이고 만다. 남자가 죽자 엉뚱하게도 아내가 살인범으로 몰리고 억울한 아내는 자살을 택한다. 한번 나쁜 길로
들어선 크레인의 삶은 꼬일 대로 꼬여 엉킨 매듭을 풀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줄거리로 보면 <파고>와 흡사하지만 <거기에 없던 남자>를 이끄는 것은 탐정의 시선이 아니다. 코언형제는 여기서 평범한 어떤 남자의 자그마한 욕망과 그로 인해 비롯된 아찔한 추락을 그린다. 그들은 이것이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이중배상> <밀드레드 퍼스> 등의 원작소설을 쓴 하드보일드 작가 제임스 M. 케인의 세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범죄소설이면서 갱이나 형사가 아니라 일상적인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코언 형제의 의도와 부합한 것이다. 어쨌든 <거기에 없던 남자>는
‘에드 크레인의 초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캐릭터 탐구에 충실한 영화이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끔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한 작품이다.
기자회견장에서 에드 크레인을 연기한 빌리 밥 손튼은 “험프리 보가트에게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말했다.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도 어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는 태도도 그렇지만 장면마다 담배를 피는 설정에서도 험프리 보가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프랑스의 <프리미어>
<텔레라마> <렉스프레스> 등이 이 영화에 최고평점을 줬으며 <포지티프>의 미셸 시망도 별 4개를 헌사했다.
악몽과 유머의 뫼비우스 띠 -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거기에 없던 남자>가 그리는 것도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지만 이 분야의 독창성 면에서 데이비드 린치를 능가할 감독을 찾기란 쉽지않다. 코언이 아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장르의 틀을 빌린 반면 린치는 <이레이저 헤드> 시절부터 개척한 자기만의 스타일로
미국의 악몽을 보여준다. 신작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는 린치가 <블루 벨벳> <트윈픽스>
<로스트 하이웨이>의 세계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필름누아르와 공포영화의 경계에서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평화로운 세계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것인지 설파했던 린치는 이번 영화에서 할리우드를 동경하던 어떤 여인의 몰락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쪽에
‘할리우드’라는 간판이 걸려 있고 다른 한편으로 대도시 LA의 야경이 보이는 한적한 비탈길을 달리는 리무진이 시야에 들어온다. 리무진 뒷좌석에
앉은 검은 머리 미인이 영문을 모른 채 살해되기 직전 마주 오던 자동차가 리무진을 들이받는다. 우연한 충돌사고로 목숨을 건진 여자는 언덕 아래
아담한 집에 몰래 숨는다. 이때 화면이 바뀌면 이제 막 LA 공항에 내린 또다른 여자가 등장한다. 금발머리에 귀엽고 천진난만한 표정의 그녀는
배우가 되기 위해 LA에 도착, 휴가 동안 집을 비운 숙모댁을 찾는다. 물론 그 집은 사고를 당한 여인이 숨은 곳. 금발 여자는 숙모집에 숨어
있는 그녀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흩어진 단서들을 좇으며 두 여자는 대도시 LA를
움직이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과 마주친다. 영화는 검은 머리 여인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리타 헤이워스 주연의 <길다> 포스터를
보며 “내 이름은 리타”라고 말하는 순간, 명백한 필름누아르의 표식을 드러낸다. 두 여인이 악의 정체를 향해 한발씩 다가설 때마다 그들 내부의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며, 치명적인 유혹이 끝없는 타락을 향한 입구가 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원래 미국 방송사 <`ABC`>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하기로 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ABC`>가파일럿 프로그램을 보고 제작을 포기한 탓에 프랑스의 카날플러스가 인수해 영화로 만들어지게 됐다. 린치는 이번 영화에서도 붉은 베일 뒤의 난장이를
등장시킨다. <트윈픽?gt;와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그랬듯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초현실적인 힘을 지닌 악마이다. 수수께기를
던져놓고 추리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의 상상을 뛰어넘는 의외의 답을 내놓는 전개방식도 전작의 연장선에 있다. 이번 영화의 플롯 역시 뫼비우스의
띠처럼 앞뒤가 뒤틀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이다. 그러나 좀처럼 어둠에서 벗어나지 않던 <로스트 하이웨이>와 달리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밝고 화사하며 유머러스한 면까지 있다. 여전히 악몽이긴 하나 린치의 이번 영화에는 누구나 한번쯤 이루고 싶은, 허망하지만
매력적인 꿈이 있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에마뉘엘 레비는 “린치의 컬트팬들을 만족시키겠지만 비평가와 관객은 찬반양론으로 나뉠
영화”라고 말했는데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전작 <스트레이트 스토리>와 함께 린치의 팬을 늘리는 데 기여할 영화이기도 하다.
잊어버려, 제리 블랙 - 숀 펜의 <서약>
수상작에 끼지는 못했지만 숀 펜의 <서약>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이다. <인디안 러너>와 <크로싱 가드>를연출, 감독으로서도 재능있다는 평가를 받은 숀 펜이지만 세 번째 영화에서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팀 로빈스의 대를 이을 만한 깊이있는 연출력을
보여준다. <서약>의 주인공은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은퇴 직전의 형사 제리 블랙이다. 내일이면 경찰배지를 반납할 제리 블랙은 살인사건
현장에 나간다. 희생자는 8살된 여자아이.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신을 목격한 제리 블랙에게 희생자의 부모를 만나 딸의 죽음을 알리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그는 딸의 살해 사실을 듣고 오열하는 부모에게 반드시 범인을 잡겠노라 맹세한다. 용의자는 의외로 쉽게 잡히지만 경찰서에서 자살하고
만다. 사건수사는 그것으로 종결되지만 제리 블랙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은퇴한 뒤에도 그는 수사망을 피해 잠적한 진범이 있을 거란 의심을 지우지
않는다. 제리 블랙은 어린 여자아이를 노린 범인이 조만간 나타나리라 여기며 다음 범행장소로 예상되는 마을 입구 주유소를 사들여 길목을 지킨다.
<서약>은 제리 블랙의 강박관념이 ‘미친 짓’이 아니라는 걸 암시하지만 등장인물들은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진실은 영영
밝혀지지 않고 제리 블랙은 모든 이의 기억에 한낱 ‘미친놈’으로 남을 뿐이다.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수많은 영화가 있지만 <서약>(Pledge)은 선악대결이나 액션이 아니라 선의를 인정받지 못하는 어떤 인간에
집중하는 영화이다. 필름누아르의 탐정과 형사들이 겪는 쓸쓸한 말로라고 할까? <서약>에서 잭 니콜슨은 팜므파탈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이 늙었고 힘도 없다. 대신 그는 가족을 갖고 싶어한다. 예쁜 딸과 함께 사는 외로운 여인(로빈 라이트 펜)을 만났을
때 남자는 그것이 이뤄질 거라 기대한다. 그러나 평화와 안식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인생은 양심과 의무감에 발목잡혀 순식간에 곤두박질한다.
그리하여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폐허가 된 주유소에서 정말 미친 사람처럼 웃는 잭 니콜슨의 표정은 잊기 힘든 이미지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에서 탐정이었던 잭 니콜슨이 맞는 이 비극적 종말은 “잊어버려, 제이크.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잖아”라는 대사를 되씹게
만든다.칸=글 남동철 기자·사진 손홍주 기자·통역 이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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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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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약>
감독 숀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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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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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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