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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레네, 매혹의 기억과의 만남
2001-05-24

모던 시네마의 첫장, 혹은 생각하는 영화

■ 알랭 레네 회고전, 아트선재센터에서 5월 25일부터 6월1일까지,11편 상영

시간과 기억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순수시공간을

창안한 위대한 감독 알랭 레네를 만난다. 서울시네마테크는 오슨 웰스, 오즈 야스지로에 이어 프랑스의 거장 알랭 레네 회고전을 개최한다. 5월25일부터

8일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릴 이번 회고전에서는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히로시마 내사랑><뮤리엘> 등 레네의

대표작 10편이 상영된다. 철학자 질 들뢰즈가 가장 위대한 정치적 영화감독이라고 불렀으며, 고다르가 무에서 영화 테크닉의 신경지를 이끌어낸

인물이라 평했던 또다른 영화 스승과의 값진 만남의 기회.-편집자

<히로시마 내 사랑>이 공개되었을 당시 이 영화를 두고 벌어진 <카이에 뒤 시네마> 좌담회 자리에서 장 뤽 고다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여기에 영화적 레퍼런스라고는 전혀 존재하질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다소 과장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고다르가 보기에 알랭 레네의 이 장편 데뷔작은 영화와 그 역사에 어느 정도 정통한 사람이라면 전혀 예측할 수

없을 그런 영화였던 것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이 그처럼 이전의 영화사와 만남을 갖지 않은 영화라는 것, 그건 다른 많은 평자들의

관점으로 봐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과거와 현재와 통교하고 그럼으로써 내면과 주관을 표현한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영화사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영화라는 매체가 다른 능력도 가지고 있음을, 즉 그것이 ‘사고’(think)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영화감독들은

카메라를 갖고 예전엔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길로 접어들 수 있었고 또 관객은 영화에 대해 다른 것을 보고 또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레네는 <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스스로 영화사를 두 시기로 나눈 인물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40년대와

50년대에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그랬듯이, 50년대 말부터는 레네가 현대영화(Modern Cinema)로의 길을 트는 작업에 선구적으로 착수했던

것이다.

영화를 처음으로 되돌리다

레네는 서른일곱이라는 그리 이르지 않은 나이에 들어와서야 첫 장편영화를 발표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 그는 이미 ‘베테랑’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아주 두터운 영화경력을 쌓고 있었다. 사실 그가 <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영화사에 남을 대단한 데뷔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과 애정이 튼실하게 축적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레네와 영화매체와의 직접적인 만남은 그의 나이 열두살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부모로부터 8mm 무비카메라를 선물받은 그는 1934년 고향 반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방에 스스로 만든 작은 극장에 친구들을 초대해 완성된 영화를 보여주곤 했다. 그 즈음 루이 푀이야드의 유명한 시리즈 범죄영화 <팡토마>를

리메이크해보겠다고 달려들었다는 것에서 우리는 알랭 소년이 벌써 대단한 영화적 야심을 마음에 품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전후 여러 영화들에서 직접 카메라를 잡기도 하고 또 편집 일을 맡기도 했던 레네는 <반 고흐>(1948), <고갱>(1950),

<게르니카>(1950) 같이 예술가를 다룬 일련의 단편영화들을 통해 일찍부터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의 단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밤과 안개>(1955)가 선보이게 되는 50년대 중반쯤에 이르면 프랑스 영화인들 사이에서 레네는 새로운 프랑스영화를

만들어갈 미래의 주역으로 첫손에 꼽힐 정도가 되었다. 레네의 이 단편영화들이 보여준 신선한 ‘충격’에 대해서는 고다르의 몇몇 글들이 잘

증언해주고 있다. 레네의 단편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던 고다르는 그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영화적 테크닉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라고 썼다. 그리고

레네는 그런 탐구를 완전히 무(無)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고 말했다. 앞으로 영화라는 것을 처음으로 되돌릴 또다른 위대한 미래의

시네아스트로부터 격찬을 이끌어낼 정도로 레네는 일찍부터 재능있는 영화감독으로 확고한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레네는 50년대

말까지도 단편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스티렌의 노래>(1958) 같은 또다른 걸작단편들만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추가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첫 장편을 만들기까지 그는 꽤 오랜 작가적 ‘형성기’를 거친 셈이었다.

리얼리즘의 외피 속에 판타스틱을 드러내다

여러 장편 프로젝트들을 무산시켰던 레네가 첫 장편으로 <히로시마 내 사랑>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주지하다시피, 프랑수아 트뤼포가

를, 클로드 샤브롤이 <미남 세르주>를, 그리고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든 것과,

즉 프랑스에서 새로운 물결이 태동하던 것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레네를 (좁은 의미의) ‘누벨바그’세대에 편입시키는

것은 부주의한 일이 될 것이다. 레네는 고다르나 트뤼포, 샤브롤보다 10년 정도는 나이가 더 많았으며 또 그들처럼 <카이에 뒤 시네마>에

영화 관련 글을 쓰지도 않았고 ‘작가영화’에 대한 그들의 신념에 완전히 동의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레네가 놓이는 지점은 종종 크리스 마르케,

아녜스 바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이 속한 ‘좌안파’(rive gauche)쪽이다. <카이에…> 그룹의 청년들과 비교해 좌안파

영화감독들은 10년 정도 나이가 많았고, 그래서 20대에 2차대전을 체험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영화에 전쟁과 그로 인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자주 담곤 했다.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던 레네는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의를 달 수 없는 좌안파 감독이다. 하지만 레네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성향에서 좌안파와 완전히 달랐고 오히려 <카이에…> 그룹과 유사했는데, 그건 바로 그가 열렬한 시네필이었다는 점이다.

<카이에…>의 젊은 시네필들과 마찬가지로 레네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자식이었다. 고다르나 트뤼포 등과 마찬가지로 레네 역시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면서 미국 영화감독들이 야만인이 아니라 예술을 아는 ‘인간’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초기의 고다르처럼 ‘미국영화’를

만들려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봐도 된다. 영화사에서 일종의 고립무원 지대에 속한 듯이 보이는 레네에게도 영화적 스승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프랑스의 지난 위대한 시네아스트들이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루이 푀이야드, 장 르누아르, 그리고 마르셀 레르비에가 그들이었다.

그래서 이들과 레네의 관계를 한번 따져보면 레네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들이 아주 조금이나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우선 푀이야드로부터

레네가 배운 것은 리얼리즘적인 외피를 갖고도 판타스틱한 것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창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레네에게는 항상 판타스틱에의

열애(熱愛)가 있음을 상기하자). 한편 르누아르가 가르쳐준 것은 사운드의 이용에 대한 것이었다(레네 영화는 민감한 귀를 요구한다). 레네가

극장에서 <게임의 규칙> 사운드를 녹음기에 담아와서는 그 교본을 수없이 듣곤 했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에 속한다. 그리고

레르비에의 작업 방식, 즉 당대의 명망있는 작가나 예술가들과 함께 일한다는 그의 방식은 레네의 그것과 잘 공명한다. 예컨대 레네의 영화들에는

거의 항상 장 카이롤(<뮤리엘>), 마르그리트 뒤라스(<히로시마 내 사랑>), 알랭 로브 그리예(<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

등처럼 공인받은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순수한 정신의 시공간, 알랭의 우주

‘레네의 영화’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마치 반사작용처럼 ‘시간과 기억의 영화’라는 명제부터 먼저 떠올린다(가끔은 <미국에서 온 삼촌>에서

앙리 라보리 교수가 “사람은 행동하는 기억이다”라고 한 말을 상기하기도 하면서). 레네에 대한 저서들과 비평문들 가운데에서도 시간과 기억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주 소수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기억의 주제는 레네 영화들에서 종종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예컨대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를 다룬 <밤과 안개>가 강조했던 것은 죽은 역사로서의 홀로코스트라기보다는 과거 기억하기의 어려움과 기억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었고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을 담은 단편 다큐멘터리 <세상의 모든 기억>(1956)이 다루고자 했던 것도 도서관이라는 물리적

공간보다는 그것을 통해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을 환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레네에게서 그처럼 중요한 주제인 기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일단 그것은 흔히 그럴 수 있듯이 회상이나 플래시백처럼 단순히 과거

이미지로 환원해서는 곤란할 듯하다. 오히려 그것은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어떤 것으로 확대되거나 또는 그것을 가리키는 다른 말로 변형되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레네가 말한 바 있듯이, 그에게 영화란 무엇보다도 사고의 복잡성, 그것의 메커니즘에 다가가는 것이니까

말이다.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X라는 남자는 A라는 여자에게 그 둘이 1년 전에 서로 사랑을 나눈

사이였음을 설득시키려 한다. 당연히 여기에서 우리는 1년 전의 과거와 지금의 현재라는 두 시간대의 존재를 상정한다. 하지만 레네는 이전과

이후를 변별할 수 있는 표시를 말끔히 지워버린다. 그래서 영화는 순전히 현재시제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물의 시선과 숏 사이의 일치도 소멸시켜버린다.

그런 식으로 해서 레네가 창조해낸 것은 전통적인 심리가 폭발해버리고 대신 정신상태가 자유롭게 부유하면서 출현하게 되는 ‘순수한 정신의 시공간’이었던

것이다.

시네마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밝히는 데 있어서 레네를 중요인물로 끌어들였던 철학자 질 들뢰즈는 레네의 영화를 두고 적절하게도 ‘사고의 영화’

그리고 ‘뇌의 영화’라고 이름붙였다. 하지만 이럴 때 우리는 레네의 영화들이 종종 프랑스의 역사적 기억에도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들뢰즈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레네를 가리켜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함께 서구 현대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적 영화감독에

속한다는 지적을 잊지 않았다. 레네식의 정치영화란 물론 어떤 정치적 강령을 소리높여 외치는 유의 영화는 아니다. 대신 그의 영화는 수용소에서

부정되고(<밤과 안개>), 폭탄에 의해 날아가고(<히로시마 내 사랑>), 고문에 의해 제거된(<뮤리엘>)

인간의 사라진 ‘자취’를 통해 집단적인 비극을 환기시킨다. 아마도 레네의 초기영화들 가운데 <뮤리엘>은 가장 미묘하고 뛰어난

정치영화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내용면에서도 아주 심원하고 형식적으로도 대단히 혁신적인 이 영화에서 레네는 각각 2차대전과 알제리 전쟁에

관련된 두 세대의 비극적 기억을 떠들썩하지 않게 불러내서는 은밀하게 서로 관련을 짓는다. 결국 우리는 폭력의 역사가 순환하고 있음을 뼈아프게

바라만 본다. 공포에는 경계가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레네의 영화를 정의하는 첫 번째 방법은 어쩌면 난해하고 복잡한 영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레네에 대한 저서를 쓴 제임스

모나코가 사람들의 그런 일반적인 반응을 들려줬을 때 레네 자신은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내 영화들이 그렇게 복잡하다고 생각지

않는데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레네의 이런 안이한 반응에 또 어떻게 반응하던 그건 개인의 자유이겠지만, 단지 난해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놓치고 마는 일이 될 것이다. 그건 일단 영화사의 중요한 한 시기를 관찰하지 못하는 일이 될 것이며 어떤

누구라도 결코 완전히 파헤치지는 못할, 레네 영화의 무진장한 매력을 탐구하는 데로부터 배제되는 일이 될 것이니까 말이다.

홍성남|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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