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로 화려하게 차려진 여름 극장가의 주메뉴가 식상하다면, 스릴러와 코미디 위주의 장르 탐사도 너무 익숙하다면, 여기 제 언어로 말을 걸어오는 감독들의 영화는 어떨까. 제대로 알아듣기까지는 때로 인내가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집요하리만치 진솔하거나 낯선 각도의 시선을 좇다보면 좀더 풍요로운 영화풍경을 접할 수 있다. 우선 가장 따끈따끈한 화제작은 올 베를린영화제 수상작으로 전주영화제에서 인기몰이를 한 왕샤오슈아이의 <북경 자전거>다. 자전거 배달로 먹고 사는 구웨이, 친구들과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전거가 필요한 지안 등 서로 다른 이유로 자전거가 절실한 두 소년을 통해 중국 젊은이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자파르 파나히의 <순환>은 이란 여성들의 억압된 삶을 다큐멘터리적인 리얼리즘으로 드러낸 영화. 감옥에서 도망친 4명의 여성들, 가장 소외된 이들의 고달픈 발길을 따라 남편의 동의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성들의 암담한 현실을 파고든다.
비루하고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접근법이 좀 버겁다면, <간장선생>과 <기쿠지로의 여름> 등 두편의 일본영화가 품은 온기에 눈을 돌려도 좋을 듯.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의 <간장선생>은 2차대전중 아들을 잃고 간염 치료에 전념하는 노의사와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삶을 끌어안으며, 전쟁의 상처 틈에서 인간다운 욕망과 희망의 가치를 재발견한다. 기타노 다케시의 <기쿠지로의 여름>은 재혼한 엄마를 찾아가는 아이와 전직 야쿠자였던 이웃 사내의 로드무비. 폭력과 시적인 명상을 한 화면에 담곤 했던 전작들과 달리, 순수함과 외로움이 닮은 꼴인 두 사람의 여정을 훈훈한 서정으로 그려냈다.기존의 영화문법을 비틀며 독특한 표현영역을 찾아가는 미국 인디작가들의 저예산 실험도 주목할 만한 수작들. 특히 선댄스영화제 수상작인 <파이>와 <레퀴엠> 두편을 선보일 다렌 아르노프스키를 눈여겨볼 만하다. <파이>는 숫자의 산출유형으로 세상의 모든 질서를 해독할 수 있다고 믿는 수학천재와 그의 연구를 노리는 세력들의 음모를 다룬 흑백영화로, SF와 스릴러를 교란하는 이미지 실험의 재기가 돋보이는 데뷔작. ‘꿈을 위한 진혼곡’이라는 뜻의 원제를 가진 <레퀴엠>은 빈곤과 마약 중독으로 희망없이 죽어가는 브루클린 거리의 절망적인 삶을 적나라하게 포착했다. 15분 이상 기억이 지속되지 않는 희귀 증세를 앓는 남자가 아내의 살인범을 추적한다는 크리스토퍼 놀런의 <메멘토>는, 거듭 수정되는 기억과 현재를 뒤섞은 구성이 돋보이는 스릴러로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6명의 출연자에게 총을 주고 죽느냐 죽이느냐를 겨루는 TV쇼를 소재로 미디어와 인간의 폭력성을 풍자한 다니엘 미나헨의 블랙코미디 <시리즈7>도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그 밖에 로마 거리에서 스쿠터를 타던 순간, 암 치료를 받았던 기억 등 난니 모레티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세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탈리아영화 <나의 즐거운 일기>, 엉뚱한 총격전이 벌어진 마약거래 현장에서 혼자 살아남아 쫓기는 남자, ‘동정없는 세상’에 내던져진 젊은이의 사투를 갱스터영화와 서부극의 틀거리 속에 녹여낸 프랑스 감독 에릭 로샹의 <토틀 웨스턴>, 소외된 밑바닥 인생들의 욕망과 집착적인 사랑의 파국을 강렬한 색감으로 그린 아르투로 립스테인의 멕시코영화 <딥 크림슨>, 록밴드 멤버인 엄마와 자신에게 어울리는 아빠를 찾는 소년 차스키의 이야기인 스웨덴영화 <차스키> 등 국적만큼이나 다채로운 렌즈에 담긴 세상 풍경을 만날 수 있다.황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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