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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래즈베리상
2001-03-29

할리우드는 불쾌해? 대중은 유쾌해!

◆최악의 영화 선정하는 골든 래즈베리 영화제, 어느덧 21회 맞아

LA의 도로시 챈들러 파비온에서 제53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던 1981년 3월31일, 샌타모니카

틴셀타운이라는 곳의 한 가정집에서는 30여명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조촐한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집 주인인 존 윌슨과 그의 동료들은

어설프기 그지없는 시상대와 가짜 마이크가 설치된 거실에서 오스카 시상식 중계방송을 보며 자기들만의 영화제를 열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지금은

연례행사로 널리 알려진 ‘최악의 영화상’ 골든 래즈베리상의 시작이었다. 줄여서 래지상(Razzie Awards)으로도 불리는 이 상은 그

시작이야 어쨌든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선 최고의 영화나 배우, 스탭한테 상을 수여하는 여타 상과는 달리 최악의 작품 및 영화인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고수해왔다. 물론 이 영화상 시상식을 TV로 중계하는 일은 아직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지만,

매년 오스카상 시상식 전날 발표하는 래지의 ‘최악’ 명단은 영화팬들을 즐겁게 한다. 심지어 오스카상 시상식의 일부로 느껴질 정도로 이 상은

이제 빠져서는 안 될 ‘양념’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고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류는 가라`

이 신통방통한 상에 관해 파헤치다보면 모든 것이 골든 래즈베리상과 골든 래즈베리재단의 창립자인 존 윌슨이라는 인물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래지상은 윌슨이 매년 열던 ‘오스카상 파티’에서 출발했다. 영화와 TV시리즈의 라디오, TV광고 제작일을 하고 있던 그는 오스카상이

열릴 때마다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최악의 상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애초엔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함께 파티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주로 영화계 인사들이다보니 어찌어찌 이 상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언론 등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윌슨은 아예 공식적인 시상식으로 발전시키자는 생각을 해 4년째인 84년부터는 행사장도 자기 집에서

인근 학교의 강당으로 옮겼고 날짜도 오스카 당일에서 전날로 바꾸는 등 본격적인 언론 플레이에 나서기 시작했다. 래지상의 명성이 올라가면서

언론의 관심도 높아져 LA의 할리우드 루즈벨트 호텔에서 개최된 지난해 행사의 경우 수백명의 기자가 몰려들어 연회장이 터져나갈 듯했을 정도였다.

상이라고 해봐야 빈 필름 릴 위에 딸기의 일종인 래즈베리 모양의 조형을 올려놓은 시가 4.27달러짜리 트로피뿐이지만 오스카를 취재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몰려온 기자들에게 래지스는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이처럼 언론이 이 상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최악’의 무언가를 꼽는다는 것이 흥미로운 탓만은 아니다. 미국 주류사회와

할리우드 시스템을 조롱해대는 래지상의 ‘정치적 올바름’ 때문이기도 하다. 래지상은 첫해인 1981년 로널드 레이건에게 최악의 평생공로상을

시상했다. 그해가 바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한 해라는 점을 생각하면 래지상이 추구하는 유쾌함의 세계가 단순히 장난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윌슨은 “래지는 학교에서 품행이 단정치 못한 아이들과 같다. 우리는 아주 무례하고 보수적이지 않고 다수의 술렁거림에 우르르

따라가는 그런 성향이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동안 래지상을 빛낸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이들의 일관된 지향은 드러난다. 85, 86년

최악의 남우주연상을 최초로 ‘연패’했고 감독상, 각본상 등 총 8개의 상을 받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대표적인 경우. 지극히 미국의 패권주의적인

<람보> 시리즈는 물론이고 <록키4>를 통해 ‘권투의 냉전화’까지 이뤄낸 레이건 시대의 초상과도 같은 그는 역대 최다 수상자의 영예를 갖고

있을뿐더러 지난해엔 20세기 최악의 남자배우로 ‘당당히’ 꼽히기도 했다. <원초적 본능> <쇼걸> 등의 시나리오를 쓴 조 에스터하즈도 래지상

역사에 남는 인물. 96년 <쇼걸>로 최악의 각본상을 받은 그는 이듬해에는 <앨런 스미시 필름>으로 최악의 각본상은 물론이고 최악의 조연,

최악의 신인, 최악의 주제가상까지 받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외에도 래지상의 단골손님으로는 마돈나, 케빈 코스트너, 보 데릭, 폴리 쇼어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을 ‘상습범’이라고 부르는데, 하여간 이들은 참여했다 하면 우리가 관심을 끌 만한 영화를 만들어준다”고

윌슨 스스로 인정하듯 이들은 래지상에 ‘찍힌’ 인물이지만 해당 작품과 그들의 면면을 곱씹어보면 그토록 자주 수상자 명단에 오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래지상 명단에 늘 그렇고 그런 이름들이 오른다고 해서 친구 몇명이 대강 꾸려나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저 한번 웃자고 해본’ 초창기야

그렇다 치더라도 틀을 잡아나가기 시작한 이후 래지스는 공정성에 꽤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래지상을 이끌어가는 핵심 구성원은 20여명.

이들은 미국 35개주와 10여개국에 흩어져 있는 530여명의 심사위원단을 관리해 시상식을 만들어 나간다. 심사위원들 중 상당수는 영화관계자들로

이뤄져 있다. 기자, 제작 관련 종사자뿐 아니라 골든글러브 같은 상의 심사위원도 포함돼 있다. 미국 언더그라운드영화계의 대부격인 존 워터스도

이 상의 심사위원이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모집된 투표인단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기실 래지상 관계자들은 할리우드의 내외곽에서 종사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스템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윌슨은 “할리우드에서

엄청나게 나쁜 영화가 그토록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영화산업이 창조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은행가와 투자자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우의 출연료나 특수효과 등에 들이는 비용 때문에 최소 5천만달러에서 1억달러 정도의 돈이 없으면 큰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됐다는 것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래지상이 비즈니스맨의 게임장으로 전락한 할리우드를 구원할 수야 없겠지만 최소한 딴죽을 걸며 ‘똥침’을 놓는 구실은 톡톡히 하고 있다. 래지상은

오스카상을 반대하거나 대안적이라는 의미로도 유명하다. 오스카상을 그냥 ‘다른 상 시상식’(OTHER Award Show)이라고 부르며 권위를

그닥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돈을 아무리 많이 들인다 해도 “좋은 영화보다는 나쁜 영화가 훨씬 많은데 그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키스나

보내고 히히거리는 꼴이 볼썽사납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또 3시간, 4시간이 넘도록 지루한 시상식을 통해 “빈약하고 거드름피우듯 화려하게

잰 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오스카상에 대한 래지의 불만이다.

따끔 매콤한 유머, 삐딱해도 좋다

래지상은 대중이 즐거워하는 만큼 할리우드 관계자들에겐 불쾌함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많은 할리우드 인사들은 래지상에 불편한 심정을

토로해왔다. 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최악의 조연상을 받은 톰 셀릭의 경우 래지상에 대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밀실에서 쿵짝거리는

비열한 인물들로 비난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눅들 래지가 아니다. 이들은 결국 한 토크쇼에 출연한 셀릭에게 트로피를 전달했으며,

`LA컨피덴셜` 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으러 시상식장에 온 브라이언 헬겔런드에게 <포스트맨>의 ‘공로’를 인정하는 트로피를 건네주기도 했다.

어찌됐건 최악이라는 비판을 받는 자리이므로 래지상의 시상식장은 다소 썰렁할 수밖에 없다. 그냥 명단만 죽 발표하면 끝이니까. 래지상 역사를

통틀어 상을 받으러 온 수상자는 단 한명뿐이다. 6개 부문을 석권해 역대 최다 부문 수상 기록을 갖고 있는 <쇼걸>의 폴 버호벤 감독은

당시 시상식장을 찾아 함께 낄낄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 기립박수를 받는 등 쿨한 면모를 보여줬다.

햇수로 21년째를 맞는 래지상은 지금까지 무엇을 이뤄냈을까. 창립자 존 윌슨은 “영화제가 지금까지 꽤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고 인정하면서 데미 무어가 몇년간 주춤했다거나 소피아 코폴라가 배우 생활을 접은 것, 실베스터 스탤론의 부진 등에 영향을

끼쳤을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처럼 지독히 ‘안티’정서에 철저한 영화상이 주류 시스템에 무슨 큰 영향력을 끼쳤겠냐마는 관객에게

어떤 영화가 ‘나쁜 영화’인가를 스스로 묻게 하는 기능 정도는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긴 그것도 아니라면 뭐 어떤가. 래지상의

따끔하면서도 매콤한 유머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비딱한 영화팬들이 지금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니 말이다.

문석 기자 ssoony@hani.co.kr

황혜림 기자 blaue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