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 같던 살림꾼 남편이 알고 보니 전직 정보사령부 특수요원이었다니. 이명훈 감독의 <크로스>는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던 전직 요원 남편 강무(황정민)와 현직 강력계 에이스 형사 아내 미선(염정아)이 힘을 합쳐 거대한 방산 비리를 추적하는 코믹 액션물이다. 평화로운 일상을 바라며 오랫동안 숨겨온 남편의 비밀 탓에 두 사람 사이에 겹겹이 쌓인 오해는 곧장 거대한 범죄의 소용돌이로 이어지게 된다. <크로스>의 핵심은 일상과 첩보 공간 사이의 극명한 대비다. 여느 부부의 하루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풍경 뒤로 고문과 총격 그리고 음모로 휩싸인 낯설고 어두운 공간을 구현할 장소가 곧 급박한 액션의 쾌감을 결정했다. 바다와 산을 고루 갖춰 두 가지 매력을 겸비한 부산이야말로 반전 매력을 드러내기에 최적의 선택지였다. 미선의 마약 범죄 검거 현장, 강무의 특수요원 시절 작전 수행 공간, 역대급 군납 비리를 계획했던 희주(전혜진) 일당의 본거지까지. <크로스>속 짙은 범죄의 그림자가 드리운 현장은 모두 부산의 공간 아래서 새롭게 탄생했다. 당시 <크로스>촬영을 위해 프로덕션 초기부터 긴밀하게 소통했던 김아현 당시 부산영상위원회 촬영지원팀 담당자와 유춘수 사나이픽쳐스 제작실장, 직접 현장에서 이미지를 꾸려갔던 박정훈 촬영감독과 이나겸 미술감독의 이야기를 토대로 <크로스>가 부산에서 담아낸 제작기를 전한다.
경쾌한 액션의 시발점이 된 중고차 단지
영화의 초반부,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이하 강수대) 에이스 형사인 미선은 마약 거래 정황을 제보받고 팀장 상웅(정만식)과 함께 중고차 매매단지를 급습한다. 평범한 중고차 시장처럼 보이는 일상적 공간이 실은 마약범죄에 활용되고 있다는 설정은 <크로스>의 핵심을 관통한다. 감만 자동차매매단지에서 촬영된 수사 장면은 “미선이 강수대 에이스로서 활동적이며 유능한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포인트”(이나겸 미술감독)였다. 앞으로 펼쳐질 액션의 톤 앤드 매너를 예고하는 중요한 시퀀스에서 “다른 중고차 매매단지보다 넓고 평지인 데다 야외에 쫙 펼쳐진 중고차 행렬이 주는 광활한 이미지”(유춘수 제작실장)를 갖춘 감만 자동차매매단지는 호쾌한 액션의 장이 되기에 충분했다. 박정훈 촬영감독은 바다를 인접하고 있다는 특장점을 언급하며 “고가 다리와 넓은 바다가 화각에 걸리는 인상적인 풍경” 속에서 경쾌하고 시원한 액션 장면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기가 느껴지는 부산의 부둣가
주부 9단이기 전에 정보사령부 특수요원이었던 강무의 전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펼쳐진 특수 군사작전 장면으로 설명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직접 러시아로 향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크로스>제작진은 항구 도시 부산을 블라디보스토크로 탈바꿈하기로 했다. 대규모 무기 밀수가 이뤄지는 대형 화물선 촬영은 세주 파이오니아호를 활용했고, 한국해양수산연수원 실습선 한우리호에서 선체 내부 촬영을 추가로 진행했다. 특히 세주 파이오니아호의 경우 실제로 운행 중인 선박이었기에 조율할 부분이 많았다. “부산영상위원회, 부산항만공사, 부산항보안공사, 경찰까지 모여 보안 회의를 수차례 진행할 정도로 상당히 규모가 컸던 촬영”(김아현 당시 부산영상위원회 촬영지원팀)이었으며, 촬영 일정도 “일주일에 한번씩 제주와 부산을 오가던 선박의 스케줄에 맞춰 감만항에 정박하는 시간에만 한시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유춘수 제작실장)
짧은 촬영 일정을 최대한 활용하여 찍어야 했던 블라디보스토크 장면은 유관 업체, 부산항만공사, 부산영상위원회, 스태프들이 모두 힘을 합친 덕에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었다. 유춘수 제작실장은 “회사별로 위치가 전부 정해진 항구의 컨테이너를 임의로 조정하기란 부담이 있었다. 각 업체의 배려 덕에 원래 구상하고자 했던 세트 배치를 성공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며 특별히 유관 업체의 협력에 고마움을 표했다. 박정훈 촬영감독도 가장 공을 들였던 촬영 중 하나로 선상 장면을 꼽았다. 한 차례 로케이션 헌팅을 할 때부터 “좁은 선박 내부의 특성을 고려하여 구역별로 조명과 각도를 세밀하게 조정하여 세주 파이오니아호만이 지닌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냉기와 혹한의 도시다. <크로스>의 제작진은 화면에 담길 기후에서도 도시의 한기가 느껴지길 원했다. 이나겸 미술감독은 “북방 특유의 기후를 표현하기 위해 두꺼운 겨울 군복을 입히고, 습기와 스모그를 이용해 자연스러운 해무를 연출했다. 일반적인 항구의 톤과 달리 무채색 계열을 사용해 차갑고 다소 황량한 타국의 항구를 그려내려 했다”고 전했다. 시각적으로 부산을 러시아로 인식하게 하기 위해 러시아 항만의 사진 자료를 다수 참고했다. “러시아어 간판과 현지에서 사용하던 안내판은 물론, 선박 내부 구조와 갑판 위의 물건마저 러시아 선박처럼 그려내려 했다.” 미로처럼 얽힌 컨테이너와 선실 사이에 보이는 작은 디테일마저 놓치지 않았다.
특수요원의 운명을 결정 짓는 작전실과 고문실
낯선 땅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컨테이너 미로를 헤치며 강무와 금석(김준한)이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희주는 작전실에서 두 사람을 보조하고 있다. EMP 설치와 항로 파악에 성공한 두 사람은 퇴각 도중 러시아 용병들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다. 실제 항구에서 촬영된 급박한 선박 액션 현장의 맞은편에는 특수요원들의 현지 작전실과 러시아 용병의 고문 공간인 선착장 창고가 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영남지원 두개의 창고동에서 촬영된 이 장면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디테일이 돋보인다. 당시 현장에 상주했던 김아현 당시 부산영상위원회 촬영지원팀 담당자는 “보통은 청사 건물이나 축사동을 촬영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크로스>팀은 창고를 활용한 팀들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창고 공간을 세트로 활용한 사례였다”며 인상 깊었던 점으로 프로덕션디자인을 꼽았다.
이나겸 미술감독은 “검역 시설이 지닌 독특한 구조와 특징이 이국적인 세트 구성에 큰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검역을 위해 설치되었던 시멘트 칸막이가 고문의 잔혹함과 야전의 급박함을 드러내는 삭막함으로 변모한 것이다. “작전실에는 벽에 방온 비닐을 덧대어 야전 시설의 질감을 드러냈고, 고문실로 활용된 블라디보스토크의 선착장 창고에는 한편에 생선을 삶는 대형 찜통을 배치해 무자비한 고문이 실행될 것을 암시했다. 금속 파이프와 타일 같은 차가운 소재들로 공간의 삭막함을 강조하고, 틈새로 보이는 균열과 녹을 통해 낡고 은폐된 장소라는 인상을 부여했다.”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벙커 속 카체이스
처음으로 충무시설에서 이뤄진 시도였던 만큼 의외의 상황도 발생했다. 유춘수 제작실장은 “산속에 있던 시설이라 흙먼지가 엄청 많았다. 차량을 운행하면 먼지가 너무 날려 물차를 동원해 제작팀과 함께 며칠을 쓸고 닦고 했다”며 당시를 추억했다. 추월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은 도로폭을 활용하기 위해 촬영팀은 묘수를 내기도 했다. “기존의 추격 신처럼 장비나 다른 슈팅카가 들어갈 수 없는 폭이어서 경차에 카메라를 달고 찍었다. 무술팀의 운전이 정말 중요했던 장면이다.”(박정훈 촬영감독) 그렇게 건진 좁디좁은 터널 속 카체이스 신은 거대 악에 맞선 부부의 비현실적인 첩보 공간과 그들의 현실 사이를 잇는 중요한 메타포로 활용됐다.
희주가 거대한 방산 비리 계획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고 승리를 자축하던 찰나, 강무와 미선은 죽음에서 돌아와 방위산업체 일당을 소탕한다. 위기를 감지하고 급히 차를 타고 도주하는 희주와 그를 쫓는 부부의 자동차 추격전은 <크로스>의 짜릿한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추월을 시도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좁은 터널에서 이뤄진 차량 액션은 과거 벙커로 활용됐던 충무시설에서 촬영됐다. 그간 충무시설에서 수많은 촬영이 이뤄졌지만, 차량 액션은 <크로스>팀이 최초였다. “군사시설이었기에 차가 들어갈 수 있는 시설로 건축되었지만 촬영 로케이션으로 활용된 이후 차량 액션을 찍은 건 <크로스>팀이 처음이었다.” (김아현 당시 부산영상위원회 촬영지원팀)
충무시설의 모든 것을 활용하다
“여기서 길 잃어버리면 북한도 가겠다 야.”(미선) “응, 갈 수 있어.”(강무) 본격적으로 희주 일당을 추격하기 시작한 강무와 미선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들어간 비밀 통로. 사실 이 땅굴도 충무시설의 다른 공간을 활용한 장면이다. “일주일 동안 진행된 촬영 중 <크로스>팀은 충무시설의 모든 것을 사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웃음)”(김아현 당시 부산영상위원회 촬영지원팀) 실제로 충무시설 옆에 붙어 있는 외부 창고에서 진행된 땅굴 장면은 제작팀이 설치한 레일을 제외하곤 아무런 꾸밈도 없이 담은 공간이다. 유춘수 제작실장에 따르면 “외부 창고 옆에 소화전처럼 생긴 문을 열면 충무시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로 “특별히 손대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 있던 곳”을 발견해 촬영에 활용했다고 한다.
승리를 직감한 통쾌한 위닝숏
“나 아시아 넘버 투야.”(미선)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했던 미선의 아시안게임 사격 은메달 수상 경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저 멀리 떨어진 가스통을 조준 사격한 미선의 한발 덕에 최후의 도주를 감행하던 희주의 차는 수바퀴를 굴러 전복되고 만다. 대부분의 차량 추격 장면은 충무시설에서 촬영되었지만 유일하게 차량 전복 장면은 송강중공업 폐창고에서 이뤄졌다. 유춘수 제작실장은 이 장면을 언급하며 “차가 회전하여 전복되는 역동적인 장면이기 때문에 오래된 충무시설에서 이를 구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급히 CG를 위해 넓은 부지를 물색하던 중 부산영상위원회의 도움으로 송강중공업 폐창고 앞 부지를 활용할 수 있었다”라며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