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체구와 작은 키에도 남들에게 쉽게 지지 않는 악다구니를 쓰는 아이. 그러나 마음 한켠엔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는 짙은 외로움을 품은 아이. 하니가 품은 서사와 설정은 이 작은 소녀를 끌어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1985년 <보물섬>에 처음 연재를 시작한 <달려라 하니>는 3년 뒤 여름, KBS2에서 국산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직 달리는 것 외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여자아이는 스승 홍두깨를 만나, 자신을 지지하는 창수를 만나 비로소 외연을 넓히기 시작한다. 이제 하니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는다.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을 통해 창작 IP로서 <달려라 하니>의 가능성은 입증되기에 충분하다. 새 관객을 만날 채비를 마친 하니를 다시 들여다보기 위해 그를 사랑으로 낳고 기른 원작자 이진주 작가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 <달려라 하니>40주년을 맞이하여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극장판이 탄생했다. 처음 이 제안을 받았을 때를 기억하나.
<달려라 하니>가 잡지 연재를 거쳐 TV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고, 이제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나오기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마지막 꿈이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하니와 함께 애리가 공동 주연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내게 신선한 도전이자 충격으로 다가왔다. 원래 <달려라 하니>는 ‘새벽을 달리는 나애리’로 구상되었다. 그런데 당시에 하니 캐릭터가 인기를 얻으면서 출판사의 요구대로 중학생 하니가 주인공이 되었다. 그 바람에 조연으로 밀려난 애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이제야 그 빚을 갚을 수 있어 행복하다.
- 원작자로서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의 시나리오에 의견을 보태기도 했나.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의 스토리 구성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달려라 하니>속 원작 캐릭터의 성격과 개성이 왜곡되지 않도록 오직 감수만 했다.
- 2025년의 하니와 애리는 Z세대로 발돋움해 있다. 버즈를 끼고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애리,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하니 등 다음 세대로 전환된 인물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아무리 시대가 흐르고 환경이 변해도 한창 자라는 10대 청소년이 배우는 우정, 사랑, 인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거엔 쉽게 표현하지 못하고 감추었던 감정을 이 시대 어린 세대가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지면 좋겠다.
- 반면 <달려라 하니>원작에도 당대성이 포함돼 있다. 혼자 사는 하니는 지금이었다면 청소년 복지를 통해 쉼터 지원이나 보급품을 받았을 테고, 일정 거리가 생겨난 요즘과 달리 따뜻하게 연결된 사제지간도 당대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작가로서 그 당시 나의 바람은 아무런 계산 없이 아껴주는 사랑이야말로 성장기를 거치는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현시대를 살아보니 더더욱 절감한다. 오직 과거의 감정에 의지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친구와 동료, 선생님과 제자 등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가는 성숙한 수용이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 한편의 작품은 다음 세대에게 계속 곱씹어지고 이야기되면서 생명력을 이어가는 듯하다. <나쁜 계집애: 달려라 하니>로 <달려라 하니>를 처음 접할 어린 세대에게 하니와 애리가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나.
자신이 처한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는 진정한 용기와 따뜻한 우정, 조건 없는 사랑의 무게는 언제든 한결같다고 생각한다. 하니와 애리를 처음 접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지점이 잘 전달되면 좋겠다.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 메시지가 가닿길 바란다.
- 이번 영화에서 창수가 너무 잘생기고 멋있어졌다. (웃음) 완벽해진 창수를 어떻게 바라보았나.
코흘리개 찡찡이가 멋진 청년으로 성장하다니. (웃음) 이 모습을 볼 수 있어 참 기뻤다. 사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는 열정과 그 사람을 위하는 순수한 사랑이 창수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게 가슴 뭉클했다. 나도 그런 창수를 제일 좋아한다.
- 개인적으로 <달려라 하니>만큼 <천방지축 하니>도 좋아했다. 왼발 깽깽 오른발 깽깽, 우리의 <천방지축 하니>는 대중을 만날 기회가 없을까.
<달려라 하니>나 <천방지축 하니>모두 나의 분신이자 내 딸들이다. 이렇게 돈이 부족한 아빠를 만나 미안한 마음뿐이다. 돈을 많이 들여 꾸미고 치장해서 세상에 자랑스럽게 내놓고 싶은 마음만은 정말이지 굴뚝같다.
- <달려라 하니>TVA가 방영되던 당시, 하니의 인기를 실감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달려라 하니>이전에도 청소년 대상으로 ‘하니 시리즈’를 여러 편 발간했는데 그럴 때면 팬레터가 매일 라면 박스로 한 박스씩 배달됐다. 우체부 아저씨께 정말 죄송했다. (웃음)
- 올해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이 연이어 개봉했다. <퇴마록>부터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까지, 작가가 생각할 때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 산업이 주축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달려라 하니>가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40년이 걸렸다. 그동안 다른 집 자식들은 수백억원씩 공들여 세계를 넘나드는 축제를 벌이는데, 우리 하니는 그 예산의 몇십분의 일도 안되는 비용으로 이토록 아름답게 빚어졌다. 이 자리를 빌려 제작진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래도 아직 희망을 품는다면 출판과 잡지가 다시 부흥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깊이 있는 서사를 보여줄 수 있는 끈기 있는 작가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제대로 된 연출과 튼튼한 기본기를 지닌 다음 세대의 작가들을 만나길 기도한다.
- 마지막으로 이진주 작가의 서정적이고 용기를 잃지 않는 인물들을 사랑하는 오랜 독자들에게 한마디를 남긴다면.
잊지 마세요.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용기와 서로를 감싸는 참된 우정, 세상을 아우르는 진정한 사랑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