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머무르던 캐릭터는 어떻게 새로운 생명을 얻을까. <달려라 하니>40주년에 맞추어 재탄생한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는 그간 하니의 라이벌이자 촉매제로 기능해온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애니메이션이다. 2025년 이들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무선 이어폰을 끼고 달리는 모습이나 “우리 집에 신문 넣지 말랬는데도 네(하니)가 넣었잖아”라고 감정의 근원을 설명하는 애리의 모습은 그간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달의 뒷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뀐 건 시대상이나 설정만이 아니다. 하니와 애리는 그간 각자의 이유로 달려야만 했다면, 이제는 달리고 싶어 달린다. 온전히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환희, 벅차오름의 의미를 두 친구는 안다. 이 탄생엔 어떤 과정이 담겨 있을까. 허정수 감독, 송원형 프로듀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 왜 <달려라 하니>였나.
송원형 코로나19 이후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15세이상관람가 혹은 성인이 볼 수 있는 작품이 주로 선택받는 경향을 인지했다. 특히 넷플릭스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빠르게 확산됐다. 그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작업할 수 있는 고유의 작품이 뭐가 있을까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아쉽지만 손에 꼽히는 게 몇 작품 되지 않았다. <로보트 태권 V><날아라 슈퍼보드><아기공룡 둘리>등등. 그때 드라마와 액션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게 <달려라 하니>라고 생각했다. 원작자 이진주 선생님과 인연이 있어 말씀드렸더니 “극장판은 내 평생 소원이야” 하시더라. 그렇게 진행됐다.
허정수 송원형 프로듀서님이 고전 IP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컸다. 나애리가 주인공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거기서 흥미가 생겼다. 처음 받았던 시나리오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초반 시나리오로 연출을 구상하니 120분이 넘어가더라. 압축 과정에서 함께 각색하면서 많은 과정을 거쳤다.
송원형 허정수 감독님이 키포인트 장면을 많이 덧붙여주셨다. 애리와 하니의 횡단보도 신이나 가장 마지막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장면은 감독님이 불어넣은 것이다.
- 조연 자리에 있던 나애리가 이번 영화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Z세대로 거듭난 애리의 모습은 낯설고 신선하다. 왜 애리여야 했나.
송원형 처음엔 주인공이 오직 하니였다. 이야기를 분해도 해보고 조립도 해봤는데 어떻게 해도 재미가 없었다. 하니는 너무 완벽한 설정을 가진 캐릭터였다. 그런데 애리는 설정이랄 게 없었다. 어떤 이야기든 무궁무진하게 할 수 있어서 애리를 통해 하니에게 새로운 설정을 은근 더하는 식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허정수 하니는 캐릭터 설정도 디자인도 이미 완벽한 상태였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하니 또한 너무 명확했다. 그래서 처음엔 애리가 주인공으로 잘 일어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하니가 너무 강해서. 그것 때문에 최대한 애리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정말 애썼다.
송원형 그래서 제목에 ‘나쁜계집애’가 붙었다. 처음에는 배급사, 홍보사, 심지어 감독님까지 반대했다. 아무래도 단어를 받아들이는 정서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으니까. 사실 <달려라 하니>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정확한 말은 “건방진 계집애”다. 그러다 <개그콘서트>의 유행어로 굳어진 게 지금의 “나쁜 계집애!”다. 애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면서도 <달려라 하니>가 대중에게 잊지 않게 해준 키워드였기에 문제없을 거라 판단했다. 단어 자체는 표준어라 문제가 없다. 그간의 쓰임새가 문제였을 뿐. 하지만 이제는 많이 희석되었다고 생각했다.
- 원작 애니메이션과 비교하면 홍두깨의 비중을 줄였다. 하니와 애리의 관계, 그리고 새로운 빌런 주나비와의 대결 구도에 집중한 느낌이다.
허정수 처음부터 홍두깨의 분량을 줄이려던 건 아니었다. 90분 분량의 이야기를 구축하다 보니 두깨의 서사를 넣기가 쉽지 않았다. 하니와 애리만의 시간으로 두기에도 벅찼다. 그래서 초반에 논쟁이 있었다. 고은애와 홍두깨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무척 그리워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달려라 하니>를 처음 접하는 새 세대 또한 포용해야 했기에 과거의 레거시를 꼭 갖고 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깜짝 장면으로 두깨와 은애를 녹였다.
- 달리기라는 소재는 역동적이지만 자칫하면 단조로운 장면의 반복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실제 지역에서 라이브로 달리는 ‘에스런’ 설정을 가미했다. 말 그대로 길(Street) 위에서 달리는(Run) 것이다.
송원형 어떻게 볼거리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집에서 <분노의 질주>를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꼭 트랙에서 달려야 해? 길 위에서 엎치락뒤치락 달리는 걸 보면 어떨까. 이진주 작가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 컨셉을 말씀드렸을 때에도 도시에서 달리는 아이디어를 무척 좋아하셨다.
허정수 애니메이션에서 절대 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다. 달리기, 수영…. 바닥에 발이 닿아서 역동적인 무빙을 보여주는 모든 것이 어렵다. 그런데 이 작품은 3분의 2 분량에서 달린다. 심지어 야외 달리기가 된 것이다. 배경도 너무 많고 작화도 많이 들어가고 컷 수도 늘어나면서 모든 제작자가 피를 토하며 작업했다. (웃음) 실제로 에스런을 테스트하는 데에만 몇 개월의 시간을 썼다. 설정상 무조건 액션이 다채로워야 하고 무엇보다 달리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스토리 진행으로 이어져야 했기 때문에 시나리오 전반을 조절해야 했다.
- 극장판에 브랜드명이 직접 나오는 것 또한 예상치 못한 재미다. “얘들아, 두찜 먹자~” 하는 홍두깨의 목소리에 저절로 웃게 된다.
송원형 두찜, 트립닷컴, 가농계란, 홈앤브릿지 등 총 네 군데에서 투자를 받았다. 제작 초반에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브랜드에 연락했다. 브랜드 개성과 성격에 맞춘 재미있는 장면을 완성할 수도 있었다. 특히 두찜의 경우, 현실에 친숙한 제품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때 많은 관객이 좋아하기 때문에 더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이러한 PPL은 작품 완성에 필요한 제작비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 찾아낸 방안이다. 이것만으로 애니메이션 산업에 좋은 사례가 되면 좋겠다.
허정수 이것만으로 성과가 있다. 드라마에서도 하는 PPL을 애니메이션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