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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목소리에 새겨진 푸름, 노을, 친구, <연의 편지> 김민주, 남도형 성우
이자연 사진 오계옥 2025-10-10

여름 햇살을 먹고 자란 담쟁이덩굴은 겉으로 보기에 푸르고 울창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정갈한 방향 없이 마구 뒤엉켜 있다. 아마도 10대 소년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이제 막 제 마음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가기 시작한 동순과 승규는 갈등이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관계에 서 있다. 아름다운 소년성을 타고난 김민주 성우의 동순은 갑자기 떠나버린 호연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그리워한다. 유려한 연기로 대중적 환호를 받는 남도형 성우의 승규는 틱틱거리면서도 누구보다 양궁을 원하고 갈망한다. 겉과 다른 속마음. 누구에게도 쉽게 고백할 수 없는 비뚤어진 태도. 소년들은 한창 덩굴의 성장을 따라가는 중이다. <연의 편지>의 중심축이 되어 서정성과 청량함을 드높인 두 성우 김민주, 남도형을 만났다. 이들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 것 같았다.

남도형, 김민주(왼쪽부터).

- 김민주 성우는 동순이를, 남도형 성우는 승규를 맡았다. 오디션 현장에서는 어땠나. 지금과 똑같은 인물을 연기했나.

남도형 처음부터 승규를 연기했다. 담배불을 냈냐 안 냈냐 싸우는 과정에서 승규의 감정적 폭발이 일어나다 보니 그 장면으로 오디션을 봤다. 그런데 <연의 편지>오디션 결과 발표가 정말 늦게 났다. 답변을 받기까지 보통 한달 정도 걸리지만 한달이 되도록 연락이 없으면 사실상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 그만큼 모든 사람이 작품에 심사숙고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그 녹음실이 <갓 오브 하이스쿨><노블레스>등 대작을 많이 한 곳이다 보니 그 녹음실로 부름을 받을 때면 가슴 벅찰 작품을 할 거란 걸 알기 때문에 떨어졌다는 생각에 속상했다. (웃음) 그래서 연락을 받았을 때 너무 기뻤다.

김민주 처음에 동순과 호연이로 오디션을 봤다. 동순이를 연기한 뒤에 호연이를 할 때 서너번 정도 코멘트가 다시 들어왔다. 그래서 하게 된다면 호연이를 맡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동순이가 되었더라. (웃음) 나중에 여쭤봤다. 어떤 점에서 내가 동순이와 어울렸는지. 다른 사람들과 페어를 맞춰 조화를 집중해서 봤는데 그때 동순이와 잘 맞았다고 하셨다. 섬세하게 작품 전체를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 남도형 성우는 지금까지 미소년, 정의로운 역할 등을 주로 맡았던 것을 생각하면 승규 같은 악역으로 나오는 건 드문 일이다. 인물 분석에 따라 목소리 세팅이 달라질 텐데 어떻게 준비했나.

남도형 승규는 작품에 유일한 악역이라 할 수 있다. 히어로물의 빌런보다 친구 관계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에 가깝다. 사실 지금도 종종 악역을 맡고 있지만 이런 일상적 악역은 정말 접하기 힘들어서 내게도 귀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10대 캐릭터에 감정적 깊이를 더하면 그 인물의 어둠이 너무 커져버린다. 그래서 승규가 지닌 내면의 그늘, 딱 그 나이대 아이들의 정서와 분위기를 툭툭 던지는 식으로 보여주려 했다. 평소 연기와도 많이 달랐다. 일부러 간결하고 퉁명스런 말투를 많이 썼다. 한번은 녹음 전에 승규가 신스틸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비중은 크지 않지만 묵직하게 시선을 이끄는 캐릭터일 거라 생각했는데 비중도 엄청 많았다. (웃음) 그때부터 이입 방식을 달리했다. 신스틸러라면 내 신만 완벽하게 연기하고 나름의 개성을 중시하면 되지만 비중이 큰 경우엔 다른 인물들과 전체적인 조화를 생각해야 한다. 특히 동순이와 맞붙는 장면이 많아서 김민주 성우와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강도를 조절했다.

- 영화가 챕터로 나뉜 것은 아니지만 처음 1장에 소리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2장에서는 동순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3장에서 호연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동순이 소리를 경계하다가 점진적으로 마음을 여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굉장히 중요한 미션이었을 것 같다.

김민주 처음 캐릭터 분석을 위해 미팅을 하면 “이 친구는 착한 애예요”, “시크한 애예요” 같이 단편적으로 설명 받는 편인데 동순이는 감독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서사를 알려주셨다. 그러니 동순이가 지니고 있는 입체성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생각보다 어려웠던 건 동순이가 토끼장에서 소리를 만난 첫 순간. 그때 더 냉철하고 차갑게 말해달라는 코멘트를 계속 받았다. 심지어 대사도 간단했다. “박동순.” 이름만 말하면 되는데 이걸 정말 오랫동안 반복했다.

- 동순의 감정 변화 중에서도 두번의 눈물 연기가 돋보인다. 성우에겐 눈물이 다 같은 눈물이 아니라고 들었다. 벅차오르는 눈물, 서글픈 눈물, 침잠한 눈물 등 명확한 디렉션이 주어진다고.

김민주 그전까지 동순이의 차가운 면이 강했다면 약밥을 받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인간적이고 유약한 면이 드러난다. 거기서부터 동순이가 입체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지질하고 가엾게 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동순이가 단단해지고 호연이가 아닌 다른 친구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다. 후반부에 전화를 하며 우는 장면은 진짜 호연이를 찾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진솔하고 성숙한 눈물로 연기했다.

- 승규는 소리를 내지르는 편은 아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다소 일진스럽고 불량한 모습을 보이지만 감정을 격하게 보여주기보다 되레 한톤 낮추는 식으로 표현한다.

남도형 사실 중도가 제일 어렵다. 신인 때부터 워낙 열혈 캐릭터를 많이 해온 터라 소리 지르는 것만큼은 정말 자신 있다. 그런데 승규는 전혀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몰입이 필요했다. 전혀 소리 지르지 않지만 지르는 것 이상의 느낌과 분출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걸 ‘낮은 강함’이라고 표현한다. 그래도 마지막에 승규가 나름대로 망가진다. 승규가 되었던 성우로서 그때 마음이 편했다. 승규도 이런 모습을 보이긴 하는구나, 싶어서. 절제된 연기만 해오다가 마음이 많이 풀렸다.

- 보통 목소리 녹음을 할 때와 최종본의 작화는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보다 러프한 상태에서 녹음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연의 편지>는 어땠나.

남도형 나는 민주 성우와 조금 차이가 있을 듯하다. 더빙 제작 기간 중에서도 후반부에 합류했다. 그림도 더빙도 틀이 많이 잡혀 있는 상태여서 너무나 행운이라고 여길 정도로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배경이 없는 정도? 그런데 <연의 편지>의 배경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나중에 최종본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말 하늘과 땅 차이. (웃음) 너무 아름다웠다. 거기에 음악이 더해지는 순간 감동이 넘친다.

김민주 나는 그림이 거의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했다. 약간의 뼈대가 있는 정도. 녹음할 때까지만 해도 내 대사가 어떤 강도의 음악과 섞이는지 알 수 없어서 최종 상태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음악이 당당당당 올라가면서 “찾았다…!”가 나오는 순간 소름 돋았다.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주셨다.

- 이제는 성우들이 한 녹음실에 모여 녹음하는 풍경은 과거의 것이 돼버렸다. 개별적으로 스케줄을 맞춰 각자의 역할만 녹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환경 변화가 성우에겐 더 어려운가, 더 유리한가.

남도형 내가 올해 20년차다. 아이고, 내 연차가 나오네…. (웃음) KBS <명화극장>주인공도 8번 해봤다. <명화극장>은 선배님들과 다 함께 시사도 하고 연습도 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할 때에는 내 뒤에 16명이 앉아서 나를 지켜보셨다. 정말 떨리지만 많은 사랑을 받는 자리기도 하다. 다만 혼자 녹음할 때에는 엔지를 냈을 때 심리적으로 편안하다. 서로 맞물려 연기하다가 흐름을 깨버리면 정말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 혼날 때도 많았고 엔지에 대한 공포증도 생겼다. 그런데 개별적으로 하면 그런 압박감에서 자유롭다. 또 내가 원하는 만큼 테이크를 요청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다 함께 있으면 욕심내는 게 어려운 순간도 종종 있다.

김민주 대원방송은 여전히 다 같이 녹음하는 분위기다. 쿼터를 나눠서 “7분까지 나오는 사람만 들어오세요~” 하면 우르르 다 함께 들어간다.

남도형 나도 대원에서 함께한 적 있다. <페어리 테일>을 작업하는데 성우 39명이 와서 13명씩 세번에 나눠 녹음했다. (웃음) 이게 너무 두렵긴 한데 한명이라도 같이 호흡해주면 그렇게 즐겁다.

김민주 사실 전속 때는 긴장감이 컸다. 그런데 지금은 그립기도 하다. 같이할수록 이점이 많다는 것을 연차가 쌓일수록 느낀다.

- 이전에 김민주 성우가 유튜브 채널 <남도형의 블루클럽>에 나와 같이했던 작품을 함께 코멘터리한 적 있다. 그때 민주 성우가 “우리 연기 너무 좋은데요!?”라고 반응하더라. 문득 궁금하다. 가시적으로 연기가 보이는 배우와 다르게 성우의 연기가 좋다는 것은 어떤 기준일까.

남도형 아마도 감정이 잘 드러나는 게 아닐까. 연기의 사전적 정의는 허구의 것을 진짜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 연기를 현실성 높게 하느냐, 기술적으로 하느냐 그 차이로 가른다면 단연 진정성 있는 감정을 담았을 때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다. 정확하게는 감정을 얼마나 올바르게 표현했느냐가 중요하다.

김민주 같은 마음이다. 어떤 면에선 성우의 일은 구연동화와 비슷하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그 분위기를 따라 무서워하거나 슬퍼할 파동을 만들어내는 게 연기의 핵심이다. 그 진실됨을 위해 캐릭터와 서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그래서 중요하다.

- 목소리로 모든 것을 표현해보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삶의 형태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남도형 신인 때에는 내가 꺼내 쓸 수 있는 재료가 항아리 안에 점점 쌓이는 느낌이다. 그 재료들을 조금씩 변형하면서 다음 캐릭터를 연기하고, 또 다른 삶을 살아보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그 항아리의 공간이 넓어진 느낌이다. 캐릭터에 담긴 감정의 본질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힘이 내 안에 쌓인 느낌이다.

김민주 세상에 얼마나 다른 삶이 있나, 그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보통 여러 작품의 캐릭터를 가져와서 ‘열혈 캐릭터’라고 묶는다. 하지만 이 캐릭터들을 들여다 보면 사연도, 성향도, 취향도 제각각이다. 카테고리가 같을지언정 다른 세계관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그 다양성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좋다. 내 안에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기는 느낌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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